[살며 생각하며] 두 거장의 과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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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두 거장의 과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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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김 

제네럴 컨트랙터



며칠 전, 같은 영화를 장소까지 옮겨가며 두 번이나 관람했다. 처음 찾아 간 극장은 소형영화 전용관이라 스크린 크기가 너무 작았다. 신도림역 부근의 다른 극장은 제법 화면이 큰 곳이었다. 연거푸 관람한 이유는 극중 화면에 수십 점의 ‘물방울시리즈’회화(繪畵)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좀 더 큰 화면으로 클로즈업된 화폭을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 제목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김창열 화백(1929~2021)의 일생을 다룬 자전적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연출은 프랑스 태생의 김오안(김 화백의 아들)과 부리짓 부이오 감독이 밑았다. 화가 김창열 선생은 글자를 바탕으로 극사실적인 물방울, 혹은 마대로 된 무지의 캔버스 위에 맺혀있거나 흘러내릴 듯한 물방울을 모티브로 삼은 작가다. 공교롭게도 작년에 필자가 언급했던 김 화백 관련 칼럼 중 일부를 잠시 옮겨본다.(2021.1.29). 그는 생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의 불안과 분노,공포 등을 물로 융해시킨 물방울(Waterdrops)로 투명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물방울은 잠시 맺혀 있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어찌보면 죽음이라는 것도 그냥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물방울도 아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뜻으로 그렸다”고 말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오래 전 파리 시내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에서 시작된다. 관람객들이 발길을 멈추고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김 화백 생전, 작품의 창작과정, 화실 내에서 물방울 그리는 모습, 캔버스 앞에서 오랫동안 참선하듯 앉아 그림을 응시하는 모습, 평소 예술가로서의 생활과 가족들이 등장한다. 그가 모티브로 삼은 물방울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있는가에 대한 해답도 관객들이 짚어볼 수 있게 해준다. 더불어 평소 몸에 밴 그의 과묵함이나 그림 앞에서의 침묵은 언제부터였을까에 대한 답변도 김 화백 당신의 육성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이를테면 어떤 물방울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 그가 목격했던 친구, 이웃들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떠나온 고향(평북 맹산)에 대한 그리움, 이산가족의 아픔, 서울-뉴욕-파리 등지로 옮겨 다니던 시절의 회한 등을 물방울을 통해 그려냈다. 특히 늘 근엄하면서도 말을 절제하는 아버지 김 화백 밑에서 성장한 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하여 커다란 벽처럼 느꼈던 아버지의 과묵함을 깨닫는 과정을 묘사한다. 


'과묵함'을 얘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때마침 보도된 김성근 감독의 스토리다. 야구계의 야신(野神)이라 불리는 그가 얼마 전 몸 담고 있던 소프트뱅크 고문을 사임했다는 소식이다. 53년에 걸친 야구지도자의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김 감독은 1961년 교통부에 선수로 입단하면서 한국야구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마산상고 감독으로 야구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OB(현 두산) 투수코치로 부임했고, 이어서 태평양, 삼성, LG, SK(현 SSG), 한화 등 프로야구단을 두루 거쳤다. 2018년 한화를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소프트뱅크의 고문으로 봉직하던 중 최근 지도자 생활을 마감했다. 


그가 두산 투수코치 시절, 일간지 인터뷰 때 있었던 일이다. ”김 감독님은 일본에서 건너와 의사소통도 어렵고 문화도 달라서 힘든 일이 많았을텐데,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야구팀들을 오랫동안 이끌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요?”라고 어느 기자가 물었다. ”말을 아껴야 합니다. 말수를 줄여야지요. 오로지 선수들의 훈련에만 집중했습니다. 심지어는 특정선수를 편애하지 않으려고 늘 혼밥(혼자 식사)을 합니다”라고 롱런하는 비결을 털어놓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김창열 화백이나 야구의 김성근 감독, 두 거장의 공통점이 있다. 말을 줄이고 과묵함을 실천했다는 점일 게다.(지금도 아내로부터 평소 말 많다고 핀잔을 듣는 내겐 귀감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 김 화백은 오랫동안 물방울을 모티브로 회화작업에 매진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무시로 작품 앞에 앉아 긴 침묵에 들어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야구계의 김 감독도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프로야구 게임마다 한 점 한 점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을 게다. 


노자의 글 중 이런 부분이 있다.  “말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도는 원래 말하지 않는 것이며, 입 밖으로 나온 도는 이미 원래의 도가 아니다. 말로 전하기 어렵다면 완벽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런 까닭에 물은 도에 가깝다.”(오른손에는 도덕경, 후웨이 홍,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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