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행복칼럼] 나는 어머님 기도에 중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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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의 행복칼럼] 나는 어머님 기도에 중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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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쉐어USA 대표    


엄마는 위대했다. 귀국하는 비행기 식사시간, 모든 승객은 식사에 열중했다. 오직 두 사람만 식사하지 않았다. 칭얼대는 아이와 젊은 엄마! 20대 후반이나 30대 초쯤 될 만한 엄마는 칭얼대는 아들을 달래고 있었다. 그 젊은 여인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배고픔도 잊은 듯 했다. 시장기를 느끼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다가 그 엄마를 바라보며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한참 후 착륙을 준비하는데 그 아이는 뭐가 불편한지 울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30여분 동안 아이는 자지러지듯 울었다. 착륙을 기다리는 승객들과 승무원들의 시선이 아이와 엄마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엄마는 부끄러워하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차분히 아이에 집중하며 달랬다. 그 늠름한 엄마를 어버이날 새벽에 봤다. 

   

조카뻘 되는 젊은 엄마의 모습은 한동안 머리와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의 어머님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우리 어머님도 다섯 아들을 키우시며 온갖 어려움을 겪으셨지만 늘 당당하셨다. 아들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 여러 궂은일을 감당하셨지만, 아들들을 위한 수고를 힘겨워하시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셨다. 우리 어머님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거친 삶의 고개들을 훌쩍훌쩍 뛰어넘으셨다.

   

어머님의 억척스러운 삶의 절정은 연속 철야기도였다. 어머님 40대 후반에 우리 집 상황은 어려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말단 공무원이었던 형은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었고, 철없는 나는 엄청난 방황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동생들은 초중고에 차례로 재학 중이었다.  어디를 봐도 갑갑한 상황이었다. 어머님은 10년의 세월을 매일 밤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셨다. 

   

그 10여 년의 어머님 철야기도 기간에 우리 집안 문제들은 다 해결되었고 우리 5형제는 모두 새 삶을 살게 되었다. 나는 어머님 기도 까닭에 신학교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군종목사로 입대했고, 공무원 생활을 접고 만학도로 부산대학교 대학생이 되었던 형은 늦깎이 고시생으로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법대를 졸업한 셋째는 돌고 돌아 목사가 되었고, 두 동생도 각자의 길을 시작했다. 목마른 어머님 기도는 우리 삶을 꽃피웠다. 

   

우리 형제는 어머님 기도의 힘을 믿는다. 한때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당시 우리 집 전화기는 형제들의 기도요청으로 불이 났다. 아들과 통화를 하시고 자신의 방에 들어가셔서 뜨겁게 기도하시던 어머님 모습은 근사했다. “나도 늙으면 저렇게 살고 싶다”라는 소원을 품게 되었다. 요즘도 어머님의 핸드폰은 여전히 불나고 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어머님과 전화로 기도를 드린다. 21세기 문명의 혜택으로 화상통화를 하고, 함께 기도하는 축복을 누린다. 이 화상기도 시간을 ‘행복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싱겁다. 귀도 어둡고 무릎도 약해 거동이 불편하시지만 기도하실 때 어머님은 청춘이시다. 어머님 기도는 힘차다 못해 우렁차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마다 회춘하시는 듯하다.

   

나는 어머님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사모한다. 30년 이상 목사로 살아오며 성도와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어머님 기도에 큰 힘을 얻는다. 어머님과 함께 기도하며 내가 힘을 얻는 것도 좋지만, 이 기도 시간에 힘차고 젊은 엄마를 만나서 더욱 좋다. 웬만하면 나는 이 기도시간을 지킨다. 나는 아마도 어머님 기도에 중독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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