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클래식 수트(S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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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클래식 수트(S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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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정가에서는 180여 벌의 의상을 두고 '내 돈주고 샀다, 아니다'로 시비가 한창이다. '공인이든 서민이든 진정한 옷입기는 어떤 걸까' 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는 와중에 본 영화가 있다. ‘The outfit’이다. 소위 클래식 수트(Suit)라고 하는 하는 남성정장이나 오버코트를 만드는 양복점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다.  


1958년 눈 내리는 겨울의 시카고. 쇼윈도우에는 상점 이름인 ‘Burington, Bispoke’라는 글자가 화면에 뜨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른 아침, 양복점 문을 여는 사나이가 있다.주인공인 양복점 재단사다.(영국태생 배우인 Mark Rylance가 열연). 쇼윈도우에 적힌 ‘Bespoke’의 어원을 찾아보니 17세기부터 영국에서 도입한 테일러들이 옷을 짓는 방식 중 하나라고 나와있다. 필요한 옷감을 직접 구비해 놓고 손님이 옷감을 골랐을때 Been spoken for’라는 표현을 썼는데 여기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바꾸어 말한다면 ‘맞춤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영국은 산업혁명 시작 전부터 방직산업이 발달했다. 옷감 직조 기술이 발달한 나라다.


양복지(洋服地)도 일찍이 보급된 영국이 비스포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극중 배역을 영국태생 배우로 캐스팅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 영화 제목인 ‘The outfit’는 '가봉(假縫)’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알려진 대로 가봉이란 맞춤양복을 주문하면 재봉작업 전에 손님에게 입혀보는 단계를 지칭한다. 가봉시에는 상의가 더블, 싱글, 투 버튼, 혹은 트리 버튼이냐 등을 결정한다. 손님의 어깨 선부터 허리춤, 소매, 깃, 바지길이 및 밑단 여부, 상의 뒷쪽 오픈을 가운데로 할 지, 양 쪽 끝으로 두 곳으로 할 지 등을 조정한다. 일종의 완벽한 맞춤 양복을 만들기 위한 시뮬레이션 작업이라고나 할까. 액션, 스릴러물의 영화지만 빈틈없는 장면 전개가 마치 ‘Outfit’의 단계처럼 치밀하다. 


극 중에는 재단사의 손이 되어주는 양복재단용 손때 묻은 대형 가위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클래식한 양복점의 내부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60~70년대 서울의 맞춤복 전문 양복점들은 주로 광교와 명동에 포진하고 있었다. 미조사, 한영, 한흥, 지큐양복점 등이 자리잡고 있던 때다. 그후 1980년대 들어서는 맞춤복보다는 기성복 전성기가 시작됐다. 기성복 브랜드는 제일모직 장미라사(羅紗), 반도패션, 코오롱 맨스타, 브렌우드, 삼풍 캠브리지 등의 기성복들이 맞춤복을 대신했다. 맞춤복은 완성하려면 3~4주씩 걸리는데 기성복의 경우, 몸에 맞도록 간단한 수선만 하면 바로 찾아 입을 수 있어 수요가 급증했다.


중학생 시절 양복점 재단사인 친척 아저씨의 소개로 방학 때면 아르바이트로 양복점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양복점 주인은 미도파백화점과 신신백화점 두 곳의 양복점을 운영했다. 겨울이면 신상품인 양복들을 십여 벌씩 껴입고 종로에서 명동까지 운반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양복점 재단사가 멋있어 보일 때가 있었다. 누런 갱지 위에다 여러 색상의 쵸크로 어깨선을 그리고 체형에 맞게 본을 뜬 다음 가위로 잘라낸다. 이때 사각사각 나는 가위소리가 소년의 눈에는 참으로 신기했다. 


남성용 양복정장 수트와 관련해서 기억되는 책이 있다. 『클래식 수트와 남자의 멋』(남 훈 著, 2017년)중 일부를 옮겨본다. "많은 남성들이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입는 것으로 생각한다. 혹은 고급 수트를 맞추고서 바지를 짧게 입으면 무조건 클래식 한 것이라고 믿어버리기도 한다. 그런 일도 물론 있지만, 반대로 두 가지가 전혀 상관없는 일도 있다. 남자의 멋이란 직업이나 재산, 키와 브랜드로 드러나는 게 아니다. 예컨데 해외 패션쇼에 즐비한 이십 대의 젊고 마른 모델이 입은 최고급 수트는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자신이 지금 입고 있는 수트를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키가 크지 않고 적당히 배도 나왔으며, 인생의 무게가 얼굴에 드리운 우리 주변의 남자가 체형을 고려해서입은 옷이 수트의 본질에 가깝다. 클래식한 룩이란수트나 바지의 어떤 디테일 혹은 따라하고있는 유럽 신사의 정형화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나 유행의 변화에 관계 없이 자기자신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여러 아이템들을 기획하는 방법론의 문제다.”


흔히들 좋은 옷 입기의 3대 요소는 T.P.O(Time, Place, Occation)라고 한다. 때와 장소와 싱황에 맞게 입는 것이 옷 잘 입기의 포인트라는 얘기다. 앞서 말한 ‘公人의 옷입기’ 사례에서 보듯 옷입기에도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것은 미치지못함)이 적용되는가 보다. 여하튼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캐주얼한 복장차림에 익숙한 캘리포니아 일상에서는 정장 수트를 잊고 지낼 때가 많다. 클래식 수트 두세 벌만 있어도 “그 속에 담긴 자기 자신의 역사와 자신의 품격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클래식 수트”라는 책의 저자 ‘앨런’의 말이 귀에 다가오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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