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들꽃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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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들꽃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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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린 비로 LA 북쪽 베이커스필드 방향의 5번 프리웨이 주변 산과 들이 더욱 푸르다. 테혼랜치 고개 넘어 시작되는 광활한 들판은 보기만해도 시원하다. 고개를 넘자마자 나타나는 소도시 알빈(Arvin)타운 내 중심가라고 해봐야 사방으로 과수원과 채소밭뿐인 전형적인 농촌이다. 모처럼 4월의 들꽃 구경 길에 찾아 간 곳이다. 동네 끝자락에 위치한 베어마운틴 산자락을 따라 시작되는 58번 도로 주변은 그린카펫을 깔아놓은듯 한 풍광을 보여준다. 테하차피, 랭캐스터로 이어지는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지는 산길 도로 곳곳에는 분홍, 보라, 오렌지색 페인트 드럼통을 통채로 쏟아 부어놓은 듯한 들꽃들이 근사한 화폭을 만들어내고 있다.


4월은 잊고 지냈던 시 읽기를 다시금 해보는 때이기도 하다. 시 읽기와 관련해서 시인 도종환이 내놓은 책의 서문이 기억난다. “지난 한 해 동안 저는 행복했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은 눈에 대한 시를  어버이 날이면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를 읽었습니다. 새학기가 시작될 때나 꽃이 필 때, 혹은 봄 비가 내릴 때면 그 때 그때에 맞는 시집을 뒤적거렸습니다. 일주일에 시 한 편 읽는 것과 읽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없지만, 일년 동안 매주 시를 읽은 사람과 시 한 편도 읽지 않고 사는 사람의 정서적 문화적 깊이는 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꽃잎의 말로 편지를 쓴다』, 창비 刊, 2007) 


그래서일까, 들꽃피는 계절에는 들꽃에 관한 시가 생각나서 시인 나태주의 시도 읽어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全文)


“지고가기 힘겨운 슬픔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부 리기도 버거운 아픔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꽃이되어 새가되어』 全文)  짧으면서도 강하게 전해오는 시어(詩語)들이 새삼스럽다.


거창 샛별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지인 ‘주중식’의 시도 있다. “키 크고 화려한 꽃 부러워하지 않는 들꽃/너를 닮고 싶구나/ 꽃 가루와 꿀은 벌 나비 너 가져라/ 조그만 향기마저 바람한테 나눠주는/ 아름다워라 들꽃.” 주 시인의 “들꽃 너를 닮고 싶구나 中의 일부다. 그가 들에 핀 야생화들을 보고 노래한 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그가 고향인 부산에서 교육대학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첫 부임한 통영(지금의 충무) 한산섬 낙도 교사시절이었다. 군 복무중 첫 휴가 때 친구가 살고있는 한산섬엘 들렀다가 이웃집에서 기거하던 그를 만났다. 마을 앞 바다 한 가운데 가두리 양식장에서 잡아올린 생선들을 앞에 놓고 밤늦도록 환담을 나누었다. 


그 후 수십 년을 잊고 지내다가 얼마전 웬 책장을 넘기다가 그의 글을 발견했다. 11명의 저자들이 각기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한사람’을 테마로 엮어낸 책이었다.(한길사 刊 2004).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한산섬 외딴  섬마을 학교에 부임하여 4학년 열다섯 아이를 만났다. 아이들에게 글짓기와 일기쓰기를 권장하며 지도했다. 모인 글은 타자원지에 타자하여 등사판으로 밀어서 찍어내 학급문집을 만들어 아이들에게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공들여 만든 거라서 글로만 만났던 이오덕 선생께도 한 권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 인연으로 한참 후에는 거창에 있는 사립초등학교를 소개해 주셔서 지금껏 스물두 해째 일하고 있는 학교가 샛별초등학교다. 나는 이 학교에서 학급담임을 하면서 『들꽃』이라는 학급문집을 20여년간 꾸준히 만들어 왔다.”


마지막으로 낸 『들꽃이 50號 였다. 그는 학급문집 題名을 『들꽃으로 정한 데는 “아이들이 들꽃처럼 스스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맘 때면 신경림 시인의 시 『나무』도 빼놓을수 없다.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 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아무튼 사월은 山川草木 신록 세상이 시작되는 때다. 햇볕과 바람을 나란히 나누며 꽃피우는 들꽃이 있는가 하면, 세상살이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나무들도 햇살에 눈부시다.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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