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야기] 인권신장에 기여한 5인의 흑인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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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야기] 인권신장에 기여한 5인의 흑인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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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매년 2월을 ‘흑인 역사의 달’로 정해놓고 흑인이 미국에 끼친 영향과 뛰어난 흑인 인물을 하이라이트 하는데 과학자, 예술가, 정치인, 판사, 인권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흑인이 미국에 큰 공헌을 했다. 그중 인권운동에 참여한 흑인 여성 5명을 아래에 소개한다.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는 1797년 이사벨라 봄프리라는 이름으로 뉴욕에 태어났다. 그 당시 그녀의 주인이 노예법의 점진적 폐지를 거부하자 그녀는 1826년 어린 딸과 함께 도주했다. 봄프리는 그 후 노예로 팔려갔던 아들이 남부지역 앨라배마 법정에서 풀려나게 해 노예가 주인에게 건 소송에서 이긴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되었다. 그 후 20년에 걸쳐 노예제도 폐지, 여성인권 쟁취, 그리고 종교적 관용을 외치며 전국을 순회했고, 감리교에 가입한 뒤 이름을 소저너 트루스(역: 진리의 방랑자)로 바꿨다. 1851년 오하이오 여성인권대회에서 "나도 여자가 아닌가?"란 연설로 더욱 유명해졌고 1864년 남북전쟁 직전에 링컨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은 1822년 메릴랜드주에서 아라마인타 로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었던 존 터브먼과의 결혼한 뒤 이름을 바꿨다. 터브먼은 10여년 간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고 알려진 경로를 통해 노예의 도주를 도왔다. 그녀는 또 노예제도가 폐지되지 않은 위험천만한 몇 주(州)를 수십 번씩 찾아가 흑인이 자유를 찾아 도피하도록 탈출길을 가르쳐 주었다. 1860년대 남북전쟁이 발발할 무렵, 그녀는 북군의 제임스 몽고메리 대령과 그가 이끌던 제2 사우스 캐롤라이나 보병대에 합류해 첩보원, 간호사, 그리고 요리사로 봉사했다. 



아이다 B. 웰스는 1862년 미시시피주에서 태어났으나 테네시로 이주해 교사가 되었다. 1887년 그녀는 자신이 지불한 일등석 열차에서 강제로 쫓겨난 것에 대해 체서피크와 오하이오 철도청을 소송해 이긴 후 정치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철도청은 항소를 했고 결국 테네시 대법원은 하급법원의 판정을 뒤엎었다. 그래도 웰스는 계속 린칭(lynching), 인종차별로 인한 미국 교육시스템의 불평등, 그리고 여성의 권리 및 정치참여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계속 써 냈다. 딱하게도 이런 글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아 뉴욕으로 이주하게 되었지만 웰스는 후에 NAACP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았고 1931년 사망하기 전에 일리노이주 의회에 출마하기도 했다.



로사 팍스는 1913년 2월 앨라배마주 터스키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32년 남편 레이먼드 팍스와 결혼했고 재봉사로 일했다. 그녀가 42세 때 백인 승객에게 버스 앞자리를 양보하고 뒤로 이동하는 것을 거부한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짐 크로우 시절(Jim Crow: 미국 남부에서 백인이 법을 무시하며 인종차별을 하던 시절을 일컫는 표현)에는 흔한 일이었다. 그녀의 체포는 1만7000명의 흑인이 몽고메리 버스 시스템을 13개월 간 거부하게 만들었고 시내버스업체의 수입이 크게 줄었다. 버스표 불매운동은 1956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인종별 버스 좌석차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려 막을 내렸지만 로사 팍스는 1년 후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NAACP 및 여러 하원의원과 함께 인종차별에 맞서 계속 싸웠다. 그녀는 또 노숙자 퇴치를 위해 직업훈련소를 설립했고 1991년에 연방의회로부터 명예훈장을 받았다.



끝으로 미국 하원의회에 진출한 최초의 흑인여성 셜리 치솜은 1924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치솜은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사회학 학사학위를, 컬럼비아대학에서 초등교육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 교사, 유치원 원장, 그리고 교육컨설턴트로 활약했다. 치솜은 1964년 뉴욕주 의원에 선출되었고, 1968년 브루클린의 베드포드-스튜이베산트(Bedford-Stuyvesant) 선거구에서 연방하원으로 당선되어 일곱번이나 재선되었다. 치솜은 연로위원들이 맡긴 농업소위원회 임무를 거부했고, 자신이 대표하는 지역구와 연관이 있는 위원회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해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재향군인소위원회로 배치되었고 차후 교육노동위원회로 승진해 평등한 교육과 고용기회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 1972년, 민주당원인 치솜은 흑인계 여성 최초로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인종문제를 100% 해결할수는 없지만 교육을 통해 자신의 맹점을 인지하고 나아가 타인의 배경과 경험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요즘 동양인을 향한 인종혐오 범죄가 빈번히 일어나고, 또 범법자의 대다수가 흑인이기에 흑인이 미워질 수 있다. 하지만, 강제로 미국에 끌려와 수백년간 노예로 살아온 흑인에 대해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그리고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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