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새해 새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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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새해 새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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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끝부분에 있는 여주인공의 독백을 우리말로 의역(意譯)한 문장이다. 원작에는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다.’(Tomorrow is another day.)로 되어있다. 일본어 번역은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인데, 우리말 번역이 훨씬 훌륭하다. 


이 독백은 ‘오늘의 역경에 좌절하지 말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내일을 새 희망으로 맞이하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그런데 내일 떠오르는 태양도 실은 새로운 태양이 아니다. 지금껏 있어온 그 태양이다. 오늘의 태양과 내일의 태양이 다르다면 우주질서가 붕괴되는 대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내일의 태양’은 장엄하게 펼쳐지는 자연과 역사의 섭리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희망이 투사된 언어다. 옛 태양이 오늘의 태양이고, 오늘의 태양이 내일 떠오르는 새 태양이다.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옛것에서 온다. 늙어 베인 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아나듯, 지난해 가을에 담근 김장김치가 새봄의 식탁에 오르듯, 오래 묵혀진 구닥다리에서 새로움이 싹튼다. 김치·된장·치즈·요구르트…, 묵히고 삭힌 최고의 발효음식이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낡고 썩기 마련이지만, 발효음식은 삭을지언정 썩지 않는다. 정신의 발효음식은 옛 시대의 빛나는 지혜를 오랜 세월에 걸쳐 묵히고 삭힌 고전의 새로운 깨달음, 그 예스러운 새로움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자.’(Ad fontes)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이상이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르네상스의 열정이, 성서 번역에서 종교개혁의 신념이 꽃을 피웠다. 인류역사에 사람의 호흡을 불어넣은 것은 르네상스요 종교개혁이었다. 차원 높은 역사의 새 지평을 연 것은 정치와 경제의 혁명, 민주화나 산업화의 에너지가 아니었다. 근본의 자리에로 돌아가 부딪친 정신과 영혼의 쇄신, 그 인문화의 숨결이었다. 


지금 우리는 왜곡된 인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지만, 대중사회에는 인문학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문학·역사·철학 등 고전인문학은 빛을 잃어 가는데, 시중에는 ‘취업 인문학’ ‘재테크 인문학’이라는 야릇한 강좌까지 등장했다. 인문정신의 본질을 벗어난 그릇된 현상이다. 인문정신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됨, 인간다움의 길을 찾는 깊은 성찰이다. 


인문학은 실용적 정보를 마구 뽑아 쓰는 지식의 하드웨어가 아니다. 오래도록 묵힌 지혜의 바탕자리다. 인문의 숨결에는 개인의 실존과 공동체의 모듬살이에 대한 엄숙한 물음과 결단이 담겨있다. 오늘의 잡다한 대중인문학은 지식인을 쏟아내지만, 인문학의 고전들은 지혜의 인격을 가꿔낸다. 문화의 줄기는 인문정신이요, 인문정신의 씨알은 고전이다. 예스러운 새로움, ‘고전의 현재화’가 새로운 희망이다. 


지난해의 대기(大氣)는 매우 암울했다. 코로나19 재앙이 민생을 옥죄는 가운데, 대통령선거를 앞둔 각 정파의 이전투구는 철학도 없고 역사도 모르고 문화도 내팽개친 ‘인문정신의 결핍’을 여실히 드러냈을 뿐 아니라, 선거운동의 전 과정을 여야 가릴 것 없이 천박하고 반인문적인 아귀다툼으로 이어가고 있다. 새해를 맞아 대통령후보들마다 새로운 정책과 비전을 다투듯 내놓지만, 거기서 진정한 새로움을 찾기는 어렵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어떤 일도 끝에 다다르면 근본의 옛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과 삶의 이치다. 새 정부가 출발하는 올해의 희망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자 헌법정신인 자유·민주·공화의 다짐이라 믿는다. 이기심과 무책임으로 타락한 자유, 포퓰리즘과 시위대의 함성으로 왜곡된 민주, 극단의 편 가르기 앞에 실종된 공화…, 이 짙은 혼란을 극복하는 길은 ‘건국이념의 현재화’, 그 예스러운 새로움에 있다. 


근본의 다짐에 충실하지 않는 한 어떤 후보의 어떤 정책도 새 희망을 낳지 못한다. 오히려 독선적 정치권력의 괴물을 낳지 않을까 걱정된다. 새해 아침, 나라의 근본이자 헌법정신의 고전인 자유·민주·공화의 옛 다짐에서 희망을 찾는다. 새해 새 태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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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니스트: 변호사로 현재 숙명여대 석좌교수로 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중앙법원장 등 법관으로 근무하던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문학, 철학 등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는 PEN International, Korea 회원으로서 인권위원장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서 문인권익옹호위원장을,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를, Seoul National Symphony Orchestra에서 명예지휘자를, FEBC(극동방송)에서 신앙 칼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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