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단풍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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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단풍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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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아닌 것이 왜 이토록 붉을까. 머잖아 마르고 시들어 땅에 떨어질 잎사귀들이 무슨 까닭에 저리도 붉어졌을까. 봄여름 내내 시푸르게 살랑거리던 나뭇잎들이 불타듯 벌겋게 돌변한 속사정이 무엇일까.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가. 소멸을 앞둔 마지막 화려한 치장, 그 처연(凄然)함에 차라리 서글퍼진다. 향기로운 봄꽃들은 삶의 소망을 실어왔지만, 가을에 붉어진 나뭇잎들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고통을 휘몰아온다. 올 가을, 단풍의 현란한 빛깔은 그 분노와 아픔을 더욱 처절하게 토해낸다. 붉게 물든 단풍은 분노의 마그마를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어 마침내 분화구를 뚫고 솟구치는 용암처럼 온 산하(山河)를 덮쳐 누른다.  


옛 시절, 예언자들은 예외 없이 부(富)와 권력을 향한 분노의 심판을 경고했다. 산불 타듯 온 숲을 벌겋게 물들인 단풍은 분노의 예언자다. 그 예언자는 경고한다. 어느새 겨울이 닥쳐오리라. 물은 얼어붙고, 땅은 황량해지고, 꽃은 시들며, 나무들은 앙상한 뼈를 드러내리라. 


풍요를 누리고 있는가, 곤궁한 날이 다가오리라. 평화를 노래하는가, 살벌한 아귀다툼에 숨 막히리라. 벼(禾)에 불(火)을 붙인 가을(秋)은 이제 서민들의 가슴에도 무서운 분노와 고통의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만이 아니다. 민초(民草)들의 울부짖음이, 젊은이들의 노호(怒號)가 들리지 않는가. 


공정과 정의를 무참히 짓밟은 권력실세 일가족의 어지러운 행태에 서민들은 분통이 터진다. 부동산투기와 전쟁을 벌인다는 정권에서 권부(權府)의 입이 부동산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터져 나오자 무주택자들은 절망의 늪에 빠져든다. 어렵사리 학교 문을 나선 아들딸들은 꽉 막힌 취업의 길 앞에서 좌절한다. 올 가을의 붉은 단풍은 그 분노, 절망, 좌절의 마그마를 한꺼번에 분출하는 격렬한 핏빛 항의다. 


정치권력만이 아니다. 지식인들, 법관들, 장성들은 청년세대의 분노를, 서민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던가. 선거철이 다가오자 대통령후보들 곁에는 폴리페서들이 패를 갈라 줄을 서고, 건전한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들이 쏟아져 나오고, 번쩍이는 별을 단 군인들은 북쪽에서 시도 때도 없이 쏘아대는 미사일이 별것 아니라고 감싸느라 입술이 마를 지경이다. 


몇몇 특정인에게 어마어마한 돈벼락을 안겨준 민관공동 개발사업은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아픈 상처를 더 깊이 들쑤셔놓았다. 검은 돈의 물줄기가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흘러들었는지 밝혀져야 할 텐데, 아마도 여야 정치권과 권력층 주변 곳곳에 심어놓았을 방패막이들이 손 놓고 가만히 있겠는가. 온갖 방해공작을 펼칠 것이다. 돈 잔치의 검은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자 드디어 ‘마귀와 거래했다’는 고백이 나온다. 마귀와 거래한 손이 천사의 순결한 손일 리 없다. 그저 타락천사가 아니기를, 마귀와 한패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대통령선거일이 가까워오는데, 후보들의 정책이나 비전은 보이지 않고 온통 비방과 헐뜯기뿐이다. 이쪽의 과오는 정당한 일로 꾸며대고 저쪽의 허물은 범죄로 몰아치는 교활한 정치선동, 증오서린 편 가르기와 사악한 중상모략, 물불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한 권력쟁탈전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민초들의 분노를, 그 쓰라린 아픔을 더욱 짙게 물들이고 있다. 


시인은 단풍의 분노를 이렇게 읊었다. “할 만큼 했고/ 익을 만큼/ 익은 것 같은데/ 풀리지 않는/ 세속이 가소로워/ 터지기 직전인가/ 냉정한 판관이/ 결판낼 때까지/ 마음껏 울부짖어라”(임영준, 단풍의 분노) 아, 그런데 저 판관마저도 냉정을 잃은 듯 야릇한 파행(跛行)의 흔적을 남기고 있으니, 무슨 결판을 기다려 마음껏 울부짖을 수 있겠는가. 설마 마귀와 수상쩍은 거래야 했으랴만…. 

 

산불처럼 붉디붉은 단풍은 돈 잔치와 권력놀음에 취한 무리를 향해 용암 끓듯 뜨거운 분노의 예언을 뿜어낸다. 노조에 들지 못한 일용직 근로자들 곁에서 너희는 배부르고 행복한가, 곧 매서운 삭풍이 몰아치리라.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거리 너머에서 너희는 즐거운 축배로 흥청거리는가, 쓰디쓴 독배를 들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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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니스트: 변호사로 현재 숙명여대 석좌교수로 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중앙법원장 등 법관으로 근무하던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문학, 철학 등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는 PEN International, Korea 회원으로서 인권위원장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서 문인권익옹호위원장을,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를, Seoul National Symphony Orchestra에서 명예지휘자를, FEBC(극동방송)에서 신앙 칼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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