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연예인 2세가 아닌 ‘이영곤’으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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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시니어] 연예인 2세가 아닌 ‘이영곤’으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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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방송인 이영곤


가수이자 방송인 이영곤(65‧사진). 그는 흔히 이야기하는 연예인 2세다.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작사가, 작곡가였고 '한국의 스탠 게츠'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이봉조 선생이었고 어머니는 재즈풍 보컬을 통해 한국형 팝을 선도했으며 ‘밤안개’로 잘 알려진 원조 디바 현미(본명 김명선) 선생이다. DNA가 음악을 위해 태어났을 법한데 가수 데뷔는 매우 늦었다. 방송인으로서는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아버지 이봉조의 반대로 악기 근처에도 갈 수 없어 정작 45세였던 지난 1007년 어머니 현미의 데뷔 50주년 무대에서 비로서 데뷔를 하게 된다.


#. 숨길 수 없는 ‘끼’와 ‘재능’

이봉조와 현미 사이에서 난 ‘장남’이었으니 초등학교 시절 자신의 놀이터가 지금은 사라진 ‘TBC(동양방송)’였다고 한다. 특히 ‘쇼쇼쇼’가 가장 기억에 남았는데 당시 MC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을 비롯해 한명숙, 이금희, 김상희, 위키리 등과 친했고 20대 때는 ‘가수 현미’의 매니저로 일했다. 음악적 재능이야 타고 났지만 아버지 이봉조는 비록 자신이 정상에 섰지만 음악인들의 지난한 삶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가요제’에 출전하는 것조차 반대했기 때문에 ‘도둑으로’ 기타를 배워야 했다고. 그의 가계는 온통 연예인들이다. 현미의 언니 김화선은 최승희의 1기 수제자로 유명세를 떨쳤고 그의 딸들이 노사연, 노사봉이다. 여기에 노사연의 남편이 가수 이무송이며, 또다른 외가 친척으로 배우 한상진(현미가 이모), 농구선수 박정은 부부가 있으며 제수가 가수 원준희다. 또한 현미의 올케는 이시스터즈 2기로 활동한 가수 김상미인데 그 딸이 가수 아일리이니 이영곤이 가수로 활동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가 모두 음악을 했으니, 아들이 끼를 물려받은 것은 당연하다. 다만 데뷔를 언제 하느냐의 문제였을 뿐. 사실 그가 가수에 대한 구체적인 소망이 커지기 시작한 건 라디오 DJ를 맡으면서부터다. 지난 2000년 라디오코리아에 입사한 이래 그는 굵직굵직한 프로그램들을 맡아왔던 터. 그는 ‘현미 아들 이영곤의 노래’와 ‘이영곤의 노래’가 다르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열심히 활동했다. 예명으로는 ‘영’ 혹은 ‘고니’로 불렸고 지금도 명함에는 ‘고니 이영곤’으로 쓰여 있다. 명 작곡가 하광훈이 픽업하여 지난 2008년 첫사랑’으로 데뷔, 단순히 ‘현미라인’이 아닌 가수 이영곤으로 트로트계의 새 얼굴로 자리매김했다.


#. 추억여행의 통풍구

그는 재능이 넘친다. 부모에게 물려 받은 유전자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시대를 읽는 기획력도 탁월하다. ‘서수남 노래교실’이 대한민국 1호, ‘현미 노래교실’이 2호라는 전설이 말해 주듯 오랫동안 그 노하우를 전수받아 출장 노래강사로 15년간 현장에서 뛰었다. 공연기획과 이벤트, 공연 전문 MC도 그의 전문영역이고 카지노에서의 공연을 많이 기획하여 호응을 얻었다. 왁스, 박상민, 이은미, 소찬휘, 김수희 등의 공연이 바로 그의 작품.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장점이 최대한 발휘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라디오’다. 현재는 라디오서울에서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라디오는 내 친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저녁 7시에서 9시까지 ‘음악다방’을 진행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팬덤이 형성되었을 정도. 밤 프로그램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 청취자들과의 소통을 이끌어냈고 수요일에는 라이브 색소폰 연주로 들려주는 등 파격적인 방송으로 LA 코리아타운의 밤을 후끈 달궜다. 노래는 물론 가수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던 그였기에 ‘추억여행의 통풍구’를 만들어주겠다는 목표 아래 최고의 방송을 했다. 그의 장기인 원고 없는 애드립 방송에서 나오는 재치와 종영될 때까지 중복된 노래가 단 한 곡도 없었을 만큼의 탁월한 선곡은 지금도 전설로 남았다. 


#. 이영곤으로 살아가기

그는 결코 연예인 2세의 후광을 힘들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후광에 기대어 누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고니 이영곤’으로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방송과 공연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자신만의 전문분야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방송과 공연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그의 결심 때문인지 ‘이영곤’으로 촌음을 아끼며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더 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의 이러한 열정적 에너지는 각박한 이민생활을 이겨내야 하는 교민사회에서 새로운 활력소가 되어주고 있다.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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