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에세이] 이민자 아브라함의 인생 경영
안신기목사(가주목양교회)
이민자였던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에게는 육신의 조상이요, 기독교인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러한 호칭 받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개명되기까지 그 이전의 삶은 볼품없는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창15:6, 행전7:2.3), 하란에서 그의 부친 데라가 죽기까지 머뭇거렸고 가나안 땅에서 와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임의대로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실제 자신의 누이기도 하였지만)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보고 ‘찌질이’라고 불러 웃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나타난 아브라함은 삶의 초기에는 자녀도 없어 후손에 대해 막막했던 이민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머뭇거리며 살기도 하였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 속일 수도 있는 그러한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민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토대로 새운 몇 가지 인생의 경영 원칙이 그를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바꾸었다고 봅니다.
#. 비전의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이민자로서 비전의 사람으로 살기를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이민자가 된다는 것은 현실의 문제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를 안전하게 지켜줄 보호막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이러한 보호막을 깨 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가라는 비전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친히 그의 삶에 보호자로 자처해 주셨습니다.
잘 살펴보면 이 비전은 아브라함의 창의적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작품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동참한 것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 비전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낯선 이민의 땅에 오며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고 설렘으로 오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자녀가 없는 그에게 자녀를 약속하시고 새 민족을 약속하실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바꾸어 열국의 아비로 삼으시겠다는 비전의 확실함을 보장하셨습니다.
#. 공동체를 위한 헌신자로 나서야 합니다
둘째는 다문화적 상황 가운데서 아브라함이 취한 인생 경영 원칙은 다문화 상황에서 ‘공동체를 위한 대한 헌신자’로 나섰다는 점입니다. 우선 그의 출발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남하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가나안에서 부요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로 의탁해 오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이를 거절하지 않고 그들을 다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일가 안에는 자신이 길리운 자들이 용사만 318명에 이르는 집단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여인들과 자녀들을 합하면 적어도 오백여 명은 훌쩍 뛰어넘을 숫자입니다. 함께 부요함을 얻은 조카 롯의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의 행보와 크게 차별됩니다. 조카 롯은 그의 부요함을 가지고 소돔과 고모라로 갔지만 그곳이 멸망할 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오직 아내와 두 딸뿐이었습니다. 그가 함께 데리고 간 목자들은 다 어디에 간 것일까요?
또 다른 사건 하나는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가나안 남방 4개 왕국이 북 왕국에 속하였던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배반하자, 그돌라오멜이 5개국 연합군을 모아 소돔과 고모라 땅을 공격하여 정복하고 거기에 있는 모든 재산과 양식, 그리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 가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기가 기른 병사들을 데리고 따라 올라가 5개 연합군을 격파하고 포로가 된 이들을 찾아왔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재산을 찾아 돌려주었습니다. 다문화 사회에서 여러 인종이 모여 살 때, 존경받을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근거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 뿐입니다.
#. 다문화 사회 속에서는 ‘상호존중’이 중요합니다
셋째, 마지막 이민자 아브라함이 다문화 사회 속에서 그가 가진 인생 경영 원칙은 ‘상호 존중’입니다. 이 상호 존중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과 자신을 겸손하게 할 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위해 장지(葬地)를 사는 일에서 나타납니다(창 23장).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자, 아내를 장사하기 위해 헷 족속에게 나아가 자신의 사정을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gēr: 게르)요, 우거한 자(tŏšāb: 토샤브)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해주오”(창 23 : 4).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신분이 어떠하였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게르’와 ‘토샤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게르’와 ‘토샤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당시에는 이방인지만 가나안에 생활할 수 있는 거주권을 가진 사람들을 ‘게르’로, 정치적인 의미에서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은 ‘난민(토샤브)’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겸손한 요청에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나의 주’라고 부르며 밭과 굴을 모두 주겠다고 약속합니다(10~11절). 이 매장지 구입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당연시하지 아니하고 그 땅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최대한 예를 갖추어 그 땅을 구매합니다.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로부터 ‘주’라 불리게 된 것은 어떻게 그들과의 관계에서 존경받는 이방인으로 남게 되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절망의 상황에 서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생애를 역전시키는 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비전 안에는 다문화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지혜도 함께 있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그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다문화 사회인 가나안에서 그의 비전을 이루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성공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