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기독교 인문학] 인천상륙작전, 빨치산 그리고 양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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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의 기독교 인문학] 인천상륙작전, 빨치산 그리고 양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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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 (월드 쉐어 USA 대표)


   2차 대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면 한국전의 흐름을 바꾼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이다. 1950년 9월 15일에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에 반대가 많았다. 미 육군과 해군 참모총장, 그리고 미국 합참 작전 전문가들이 지형과 조수간만을 이유로 상륙작전을 반대했다. 한국전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 흐름을 바꾸기 위해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결국 맥아더는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 허락 받고 작전을 진행했다. 

   20세기 최고의 작전 중의 하나로 평가 받는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 전세를 뒤집었다. 상륙작전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북진 할 수 있었고, 수도 서울을 수복도 가능 했었다. 서울 수복은 국군, 유엔군 그리고 피난 길에 올랐던 대한민국 국민의 사기를 크게 진작 시켰다. 반면 전투력을 잃고 보급로도 끊긴 적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그런데 이런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빨치산의 기승과 양민학살사건이다. 남부군 혹은 빨치산으로 불리는 공산 게릴라군은 한국전쟁 전에도 존재했었다. 이현상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빨치산은 퇴각하지 못한 공산군 잔병을 흡수해 몸집을 키웠다. 그들이 지리산, 덕유산 등을 근거로 후방을 교란했다. 남부군 토벌을 위해 11사단이 창설되었으나 11사단은 작전 미숙과 인권 감수성 결여로 다수의 양민학살 사건을 저질렀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창설된 11사단과 경찰은 경남 거창, 전남 함평, 전북 고창 그리고 경남 산청과 함양 등에서 양민을 학살했다. 공비들에 의해 시달리던 순박한 양민들은 국군과 경찰의 등장을 반기며 따뜻한 쌀밥, 고깃국, 떡과 술로 환대 하였으나 그들은 비참하게 학살 되었다. 억울하고 서러운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피눈물이 강산을 적셨다.

   문제의 발단은 빨치산 토벌을 위해 창설된 11사단의 사단장 최덕신의 무능력과 판단 착오였다. 미국 유학 중에 전쟁 발발로 귀국하여 창설사단 11시단 지휘봉을 잡은 최덕신 장군은 철저하게 자기 안위와 권력만 추구하는 속물이었다. 전쟁 후에 외무부 장관, 독일 대사로 꿀 빨아 먹던 그는 자기 영달을 위해 월북하여 말년에 김일성 곁에서 호의호식했던 위인이다. 

   최덕신은 무능하고 잔인무도하였다. 최덕신은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벽을 튼튼히 하고 적군이 식량 조달을 할 수 없도록 들판을 깨끗이 한다는 전술이다. 그런데 최덕신의 11사단은 청야(淸野)하지 않고 청민(淸民)하며 양민을 학살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던 서럽고 슬픈 날들이었다.

   양민학살의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이 전하는 양민학살 현장은 참혹했다. 양민학살이 전북, 전남, 경남 등에서 반복적이고 다발적으로 나타났다. 국가 기관에 의한 무도하고 잔인한 학살이었다. 더욱이 국가는 양민학살을 항의하고 보상을 요구하는 유족을 적색분자로 통제했다. 유족들은 아직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난리 통에 교회들 희생이 컸다. 빨치산이 교회를 모질게 핍박했다. 핍박 당하던 성도들이 군인과 경찰을 환영했는데 그들이 성도를 학살했다. 기막힌 비극이다. 거창양민 학살 현장에 거창군 신원면 소야교회 조해권 영수(領袖)와 다수의 성도가 학살 당했다.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9월에 양민 학살의 아픔과 교회의 눈물도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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