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칼럼] 상처 위에 초록

한남옥 (시인, 수필가, 나성영락교회 은퇴 권사)
죽음의 자리에 생명이 피었다.
오늘 교회 구역모임에서 배권사님이 보여주신 그림 한 점이 나의 마음을 종일 붙잡고 있다. 권사님 부부는 우리 부모님 연배이시다. 권사님은 미술을 전공한 분이다. 구순이 가까운 연세에도 붓을 잡으면 화선지에 마음을 노래처럼 담아내신다.
보여주신 그림 속에는 한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세월을 견딘 줄기에는 큰 가지가 잘려나간 상처가 깊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험한 상처 위로 초록 잎사귀들이 소복이 피어 있었다. 배경은 노을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듯한 색감으로 물들어, 그 나무를 꼭 천국의 문턱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해마다 먼저 천국 간 아들 묘에 가. 어느 해, 묘 근처 큰 나무에서 이 장면을 봤어. 가지가 베인 상처 위로 잎들이 자라난 걸 보고 오래 서 있었어. 그리고 돌아와 이 그림을 그렸지.” 권사님은 담담히 말씀하셨지만 그 안에는 말 못할 눈물과 기도가 배어 있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들은 찬양을 잘해 성가대원으로 봉사했고, 찬양을 인도하던 믿음의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를 떠나 보낸 부모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싸우며 살아 오셨을까. 이 그림은 단지 한 장의 풍경화가 아니었다. 기도이고, 신앙의 고백이었다.
무엇보다 깊은 감동이 되는 것은 권사님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었다. 오랜 세월 수술을 반복하여 육신은 많이 쇠약해지셨다. “내가 하루에 아프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할까?” 하시면서도 여전히 기도처럼 말씀하신다. “남은 생애, 하나님 앞에 가기 전까지 내게 있는 예술적 재능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다 쓰고 싶다.” 그 고백은 가지가 잘려 상처 난 나무에서도 잎사귀를 피워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 상실의 자리를 안고도 여전히 하나님께 붙들린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이 땅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 뿌리내린 생명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이도, 지금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가지가 떨어져 나가던 순간, 침묵 속에 고통은 얼마나 길었을까. 그러나 뿌리가 살아 있기에 잎은 다시 자란다. 상실과 고통의 자리에, 하나님의 위로와 생명이 피어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린 믿음으로 초록 이파리 하나 피워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누군가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고. 천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통로가 되며,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이 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