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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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시니어! ]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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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영화계의 대부 정창화 감독과 그의 자서전 '내 영화 인생은 아직 치열하다' 그리고 친필 사인 및 낙관 / 이훈구 기자




한국 액션영화계의 대부 정창화 감독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이자 세계화를 이끈 정창화(鄭昌和·1928년생) 감독은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이정표이자, 아시아 액션영화를 세계적으로 알린 개척자다. 충북 진천 출신인 그는 1950년대 초 최인규 감독 밑에서 연출을 배우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1952년 첫 연출작 ‘최후의 유혹’을 선보이며 감독 생활을 시작한 그는 초기 멜로드라마와 사극을 통해 기초를 다진 후, 196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활극 장르를 개척했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지평선’(1961) 등은 ‘만주 웨스턴’이라 불리며 한국적 정서를 담은 액션 서사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으며 ‘노다지’(1961)는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힌다. 그의 영화들은 단순한 영화가 아닌, 전후 한국 사회의 혼란과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대중의 심리를 반영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한국 액션영화의 대부로 불리는 그는 거장 임권택 감독과 ‘영웅본색’의 오우삼 감독의 스승이자 전설적인 무협 명장 호금전 감독의 친구로 1950~1970년대를 빛낸 영화들을 두루 연출한 ‘거장 중 거장’이다. 


#. 홍콩 진출, 쇼브라더스와의 만남

1966년 홍콩에서 일부 촬영을 진행하던 그는 쇼브라더스의 란란쇼(邵逸夫) 사장의 눈에 띄었고, 이후 전속 계약을 맺고 홍콩으로 진출했다. 당시 쇼브라더스는 아시아 최대의 영화 스튜디오였으며, 정 감독은 이곳에서 자신만의 액션 스타일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정창화 감독이 활동하던 1960년대 홍콩영화계는 산업의 폭발적 성장에 비해 감독이 부족했고 이러한 토양은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그는 하루 세 시간씩 자며 쇼브라더스 소속 50여 감독들의 영화를 섭렵했다. 그렇게 얻은 액션 노하우에 스토리와 정서의 세밀한 색칠을 더해 많은 흥행작을 만들었다. 그는 홍콩에서 총 7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홍콩 무협·액션영화’의 국제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천면마녀’(千面魔女, 1969)는 데뷔작이면서 여성 빌런과 첩보 액션을 결합한 독창적 시도로 홍콩에서 흥행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시장에까지 수출되며 주목을 받았다. 이어진 ‘아랑곡의 혈투’(餓狼谷, 1970)에서는 과감한 야간 지붕 액션 촬영과 와이어 연출로 호평을 얻으며 “한국 감독도 무협영화를 훌륭히 만들 수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 ‘죽음의 다섯 손가락’, 세계를 흔들다

정창화 감독의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은 단연 ‘죽음의 다섯 손가락’(Five Fingers of Death, 1972)이다. 배우 로리예(羅烈, Lo Lieh)가 주연한 이 영화는 ‘철권’을 수련한 주인공이 악을 응징하는 서사로, 거칠고 사실적인 액션을 담아냈다.  워너브라더스가 배급을 맡아 1973년 미국에 개봉된 이 작품은 아시아 영화 최초로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사랑, 이별, 배신, 복수 등 전형적 액션코드를 개성 넘치는 캐릭터와 유려한 화면, 잔혹한 쿵푸 액션 등으로 전 세계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괴한 음향효과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2003)'에 오마주(존경적 모방)되기도 했으며 특히 영화의 리듬감 있는 액션과 혁신적인 편집, 주먹질이 관객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듯한 박력은 당시 할리우드 액션과는 차원이 다른 영상을 보여줬다.


#. “다시 태어나도 영화감독”

정 감독은 1977년 ‘파계’를 끝으로 홍콩 활동을 마무리하고 귀국했으며, 이후 화풍영화사를 설립해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생애 총 83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80년대 중반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공식적인 활동에서는 멀어졌지만, 영화계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다. 이에 대한 공로로 2013년 샌디에이고 아시아영화제는 정창화 감독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며 그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당시 그는 “영화는 제 삶의 전부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또다시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혀 많은 영화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 정창화 감독은 한국 액션영화의 틀을 세우고, 홍콩을 거쳐 미국과 유럽에까지 한국인의 영화적 감각을 전파한 진정한 의미의 국제적 영화인이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선한 긴장감과 스타일을 전달하며, 아시아 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독자적 영역을 개척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살아 있는 증거다. 그는 지금도 건강한 모습으로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며 미국 내 한국계 영화인들과 교류하고 있어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우고 있다.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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