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칼럼] 들보와 티, 악과 덜한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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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칼럼] 들보와 티, 악과 덜한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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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철 목사 (나성 순복음교회) 


 미국 어떤 마을의 제빵업자가 가까운 농장에서 버터를 사오곤 했는데 버터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하루는 그 농장에서 사온 버터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다. 화가 치민 제빵업자는 버터농장 주인을 고발하였다. 그 버터농장 주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판사가 묻는다. “집에서 어떤 저울을 사용하고 있소?”, “우리는 저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버터의 무게를 안다는 거요?”,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1파운드짜리 빵의 무게와 같게 만듭니다”, “그럼 그 1파운드짜리 빵은 어디에서 사오는 거요?”라고 하자 그 농장주인은 고소인을 가리키며 “우리는 늘 저 제빵업자한테서 사다 먹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버터의 양이 줄어든 이유는 제빵업자의 빵이 줄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우리들도 문제의 시작이 사실은 나인데, 자꾸 남의 잘못을 비판하니까 문제가 커지는 것은 아닌가?  이런 글이 있다. ‘만일 그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게으르기 때문이고 만일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너무 많은 일에 눌려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면 수다쟁이라고 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면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한다. 만일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고 하고 만일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한 것이라고 한다. 만일 그가 내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은 사람이라고 하고 만일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많은 다른 일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친절하게 하면 나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하고, 내가 친절하면 나의 유쾌하고 좋은 성격의 한 부분이라고 한다.’ 


 목수였던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티와 들보를 가지고 설명하셨다. ‘티’는 아주 작은 나무 조각, 즉 작은 결점을 말하고, ‘들보’는 집을 지을 때 칸과 칸 사이 두 기둥을 건너지르는 큰 나무다. 크기로는 들보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그러나 둘 다 눈에 있다면 잘 보지 못하게 하는 점은 같다. 예수님의 의도는 작은 티를 보는 것이 잘못이라기보다 자기 눈 속의 더 큰 들보는 못 보면서 상대방의 작은 티는 빼겠다는 것을 잘못이라고 하면서, 이런 사람을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5).


 사회비평가요 정치사상가로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는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장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죄로 타락한 인간 사회에 완전한 선은 없다. 다만 ‘악’이 있고, 그것보다는 약간 ‘덜한 악’이 있을 뿐이다. 인간 사회는 선과 악, good and evil, 둘이 싸우는 세계가 아니고, evil and lesser evil, 즉 악과 그보다 조금 덜한 악이 있어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악 ’evil’은 ‘들보’요, 덜한 악 ’lesser evil’은 ‘티’다. 그런데 ‘덜한 악’이 자기를 ‘선’으로 착각하여 남을 비판하게 되면 세상은 온통 악으로 덮이는 것이다. 남의 티가 보이는 그 때, 유일한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내 눈의 들보도 뽑히게 되고, 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므로 나와 주변에 아름다운 선이 넘쳐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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