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의 세상 읽기] 애국가(愛國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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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실의 세상 읽기] 애국가(愛國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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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정 실 (문학평론가)


 오늘은 80년째 8·15광복절이다. 몇 년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들렀을 때 시민공원에 있는 안익태(1906~1963) 선생의 흉상을 찾았을 때다. 안경 낀 선생의 흉상과 넉 줄짜리 한국어 연력을 보며, 1979년 8월 15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맞이한 나의 독일 첫날이 떠올랐다. 이날 공항에서 만난 대학친구들은 본(Bonn) 숙소로 가기 전 퀠른대성당(Kölner Dom)의 소강당에 갔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참석하는 행사가 있었다. 참석자 전원이 일어서서 애국가를 제창할 때다. 유학생과 재독교민들의 울음 섞인 애국가가 뒤섞여 촉촉하게 들려오자, 나의 가슴은 숙연해지고 아려오기 시작했다.


 애국가는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가(國歌)로 준용했고, 1941년에는 광복군 결성식에서 불린 것을 계기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공식적인 국가로 연주되고 공인되었다. 그리고 고종황제 시절, 당시 군악대장으로 조선에 와 있던 독일인 에케르트(Franz Eckert)가 1902년에 만든 대한제국 애국가가 있다. 상뎨(上宰)여 우리나라를 도우쇼서/반만년 오랜 역사 배달민족/영원히 번영 ᄒᆞ야/해달이 무궁하도록/셩디동방의 원류가 곤곤히/상뎨여 우리나라를 도우쇼서 (하나님이여 우리나라를 도우소서/반만년 오랜 역사 배달민족/영원히 번영하여/해와 달이 무궁하도록/성지동방의 원류가 곤곤히/하나님이여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원곡은 7음 음계 3/4박자인데 1910년 한·일 합방으로 인해 금지되었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대신 불러야만 했다. 이에 따라 1908년부터 애국가 가사는 찬송가 ‘찬미가’에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랭 사인’이다. 5음 음계로 온 백성이 부르기에 편하고 정서적으로 이질감이 없었다. 기미년 3‧1운동 당시에도 애국가는 이 곡조에 따라 불렸고, 온 백성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아직도 미상(未詳)이라는 점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은 1935년 ‘찬미가’ 14장의 가사를 보며 작곡했다. 분명한 것은 윤치호의 역술(譯述, 1908년·융희 2년 발행)에 ‘찬미가’ 제1, 10, 14장에 각각 다른 가사의 애국가 중 14장은 현행 4절의 애국가의 가사가 후렴까지 거의 같은 원형이라는 것이다. 1955년 7월 28일,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가 열렸다. 이날 13인이 출석해 투표결과 11대 2로 안창호를 제치고 윤치호가 확정되었으나, 전원일치제라는 확정방법에 따라 결정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루고 말았다. 

  

나라 사랑에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과 김구 선생에게 뒤지지 않았던 윤치호 선생이었지만 매일 일본인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라, 해외에 망명했던 이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분명한 것은 윤치호가 친일파였던 친일파가 아니었던 애국가 작사자를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애국가 작사자를 밝히려 하기보다는, 친일과 반친일로 시시비비만 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애국가 가사는 우리 민족의 정서에 녹아 있고 4번이나 반복되는 후렴 중 무궁화 꽃, 삼천리 화려강산의 국화(國花)는 대한민국 국위만큼 이미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져 있건만 도대체 언제까지 미루고만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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