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신호등] 몇 개의 가면이 더 필요할까

이 보 영
미주조선일보 독자부 위원
한 동물원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고릴라가 죽었다. 동물원 측은 관객들이 감소할까봐 묘안을 짜내게 되었다. 동물원 측은 아르바이트 광고를 냈다. “동물을 좋아하고, 신체 건장한, 젊은 '알바생'을 구합니다.”
일자리를 찾던 한 청년이 취직이 되었다. 그는 사육사의 지시에 따라 고릴라의 탈을 쓰고 털옷을 입고
두 손으로 가슴을 치며 딩굴고 발을 구르며 뛰어다니면서 고릴라의 관습과 행태 훈련을 받고 몇 차례 연습을 거듭했다. 진짜 고릴라처럼 몸짓과 행동이 비슷해 졌다.
드디어 다음 날부터 훈련한대로 사육장에서 진짜 고릴라 흉내로 찾아 온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관객들 모두를 웃기며 즐겁게 해주던 어느 날, 고릴라는 가슴을 치며 딩굴면서 뛰어다니며 나무가지를 잡고 건너 뛰다가 너무 오버하여 그만 사자굴이 있는 옆칸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고릴라는 아픈 허리를 감싸쥐고 사자 우리를 넘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사자가 나타났다. 너무 놀란 나머지 “사람 살려요!” 라고 급하게 소리치려는데, 갑자기 사자가 고릴라의 입을 덥석 막으며 “쉬잇 ~ 조용히 해! 들키면 우리 둘 다 해고야 !” 알고 보니 사자도 알바생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참 어려운 일 중에 하나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다. 요즘은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인다. 물건 뿐만 아니라, 가짜 뉴스, 가짜 합성사진, 가짜 신분증, 위조지폐, 음모론, 거짓말 등 가짜가 판을 친다.
저널리스트, 앵거스 허비(Angus Hervey)는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를 하고, 듣고, 전하면 좋은 세상이 되지만, 나쁜 얘기, 단점, 결점, 가짜들을 듣고, 전파하면 세상은 파멸로 갈 수밖에 없다고 정의한다.
주류 언론들이 좋은 뉴스는 놓치고, 나쁜 뉴스에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세상은 법과 원칙, 질서와 상식이 무너지고, 거짓과 가짜가 판을 치는 종국엔 ‘괴물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독일의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 고 말했다. 그는 히틀러의
나치당에서 대중계몽 선전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어록에는 “정치가가 거짓말을 자주하면 할수록 대중들은 그 말을 믿게 되며,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도 믿게 된다” 고 자기의 경험을 역설하고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진실된 사람과 위선적인 사람의 구별이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 는 속담이 생겨났다. 먼 옛날 구약시대에 한 아기를 놓고 두 엄마가 서로 자기 자식이라며 싸우다가 결국 누가 진짜 엄마이고, 누가 가짜엄마인지를 식별했던 지혜의 왕 솔로몬의 명재판이 생각난다.
우리가 즐겨보는 TV 프로 중에 미스테리 음악쇼 ‘복면가왕’ 이 있다. 가면을 쓴 스타들이 무대로 나와 수준급의 노래실력을 뽐내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가수의 계급장은 곧 ‘인기’다. 인기가수는 노래가 좀 부족해도 관중들로부터 호감과 큰 박수를 받는다. 복면가왕은 ‘인기’ 라는 편견과 계급장을 떼고 오직 진정성 있는 노래로만 자신을 나타내 실력있는 가수로 판정받는 무대다. 1:1 대결을 통해 승자는 가면을 쓴 채로 무대 뒤로 이동하지만, 패자는 진행자의 요청에 따라 가면을 벗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된다.
가면 속의 진짜 얼굴이 누군지 잔뜩 궁금증이 증폭되었던 관객들은 가면을 벗은 진짜 얼굴이 드러났을 때, 궁금증이 확 풀리면서 쏟아지는 관객들의 환호와 함성은 바로 이 음악쇼의 하이라이트 이다.
가면을 그리스어로 ‘페르소나(Persona)’ 라고 한다. 그리스시대에서 로마시대로 넘어가며 언어가 라틴어로
발전하면서 페르소나는 ‘Person’, 즉 인간, 인간의 품성은 ‘Personality’로 쓰여왔다. 결국 모든 인간은 가면을 쓰고 산다는 말이다. 나의 내면의 나 됨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에 의해 가려진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는 늘 거기에 맞는 가면을 바꾸면서 살아간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배우이다” 고로 “인생은 무대 위 한 편의 연극이다.” 누가 만들어 준 대본도 없이 스스로 창작해 가면서 진행해 가는 자존적 자유적 창조적 연극이다.
저마다 등장하여 평생 여러 역할로 열심히 연기(演技)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퇴장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연극이다.
어느 70이 넘은 노인이 병원 입원실에서 창문을 통해 보름달을 쳐다 보면서 “저 보름달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를 되뇌이면서 커튼을 계속 열어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보름달을 보아 왔지만, 건강할 때의 보름달은 의미가 없었다. 죽음 앞에서는 “몇 번 더 저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 생각이 머문다.
그는 인생은 마르지 않는 샘으로 생각하며, 펼쳐 온 자신의 연기들을 반추해 보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연기는 연애하고 결혼하고 신혼의 꿈에 잠겼던 역할로 정말 달콤했던 축제의 연속이었다. 직장에서의 연기는 열정적으로 일하고 목표를 성취해 가는 도전정신, 승진과 영전으로 희망에 찬 역할이었다.
이제 남은 인생에서 “내가 써야 할 가면은 몇 개나 더 남아 있을까?” 집 안에서는 할아버지 역(役), 교회에서는 원로나 장로 역, 젊은 세대에겐 시대에 뒤떨어진 그늘진 곳의 노인 역, 마지막 연기는 병원에 누운 환자 역이 되겠지 ! 석양에 곱게 물든 노을처럼 연기(演技)를 아름답게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연기에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진실을 구하면서 우리의 마지막 연기를 가꾸어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