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한 그 미소"… 한국전쟁 '하우스보이' 찾는 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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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한 그 미소"… 한국전쟁 '하우스보이' 찾는 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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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임진강 부근 막사 앞에서 노리오 우에마쓰(왼쪽)씨가 일본계 전우 사부로 가타오카씨와 포즈를 취했다. 앞쪽에 신원미상의 하우스보이가 보인다. /노리오 우에마쓰씨 제공  


지난 21일 새한교회에서 열린 '6.25 75주년 기념식'에서 노리오 우에마쓰씨가 한국전쟁의 참상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유타주 출신 일본계 노리오 우에마쓰씨

"70년 전 꿩 잡아오던 소년 만나고파"

새한교회서 6.25 전쟁 참상 증언도


유타주 출신 일본계 미국인으로 6·25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 제521 정보여단에 소속돼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참전했던 노리오 우에마쓰(96)씨가 지난 20일 본지를 찾아왔다. 

그는 70여 년 전 한국에서 만난 한 소년을 찾고 싶다며 한 장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우에마쓰씨는 첩보부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치열한 전투 경험은 없지만 전쟁 초기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갓난아기에게 무언가 먹이려고 애쓰던 어머니들, 전쟁고아의 비참한 삶, 공포에 떨던 민간인들, 그리고 폐허가 된 마을을 목격하며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삶이 갑자기 파괴된 것처럼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특히 포로들 중 일본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식민지 시절의 역사와 겹쳐진 이들의 사연은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한국인들에게 미움을 살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전 참전을 통해 역사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함께 짊어지고자 했다.

그는 주로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POW)들을 심문하는 업무를 맡았다. 당시 인민군 포로들 가운데는 일본군 출신도 많았고, 일본어로 심문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만 출신, 조선인, 중국인 등 다양한 배경의 포로들을 상대하다 보니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여러 언어가 필요했고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우에마쓰씨는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은 인텔리 출신 포로들과 함께 작업을 하거나 사면을 통해 심리전에 기여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주둔지는 임진강 근처였다. 그곳에서 그는 전쟁고아나 소년들을 ‘하우스보이’로 고용했는데 이들과는 마치 가족처럼 지냈다. 하우스보이는 미군 숙소에서 청소, 빨래, 요리, 다림질 등 다양한 허드렛일을 도우며 지낸 소년들을 일컫는다.

그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잘 웃던 8세 소년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꿩을 잘 잡아오던 소년은 대만계 취사병과 함께 꿩 요리를 만들어주곤 했다. 우에마쓰 씨는 유타주가 고향이라 꿩 요리는 더욱 향수를 자극하는 특별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귀국하면서 소년과 헤어졌지만 지금이라도 살아 있다면 이 기사를 통해 연락이 닿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한편 우에마쓰씨의 이야기는 미국 내 한국전 참전용사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지역 언론인 Pacific Citizen, The Orange County Register, Anaheim Bulletin, 일본계 커뮤니티 신문인 Misawa, Rafu Shimpo 등에도 그의 참전 수기가 실렸으며, ‘Not Forgotten(잊혀지지 않는)’이라는 메시지로 전쟁의 기억을 전하고 있다.

지한파로 알려진 그는 지난 21일 새한교회에서 열린 6·25 한국전쟁 기념식에서 참전 경험을 증언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쟁이 아니라,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훈구 기자 la@chosun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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