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감성 사이] 방황하는 자들의 오페라– 경계에 선 이들을 위한 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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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감성 사이] 방황하는 자들의 오페라– 경계에 선 이들을 위한 서사시

웹마스터


김미향

오클렘그룹 대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육지에 닿을 수 없다는 저주를 안고 살아가는 선장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이 숨어 있다. 네덜란드인은 떠돌이이다. 그는 땅을 밟고자 하나 언제나 다시 바다로 내몰린다. 정착을 갈망하지만, 정착에는 단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다.


이 조건은 단지 이야기 속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수많은 기준과 평가를 은유한다. 소속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항상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그너는 이를 신화와 음악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조건부 존재에 대한 보편적 감정을 오페라라는 형식에 담아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음악은 불안정하고 반복되는 파도 같은 리듬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음악적으로 재현한 장치이다. 그는 매일 같은 바다를 건너지만 그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는 정서적 유배와도 같은 삶이다.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한 존재는 공간이 아니라 감정 안에서 길을 잃는다.


이 같은 ‘경계에 선 삶’은 바그너의 또 다른 작품 『로엔그린』에서도 반복된다. 로엔그린은 신비한 구원자로 등장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그는 사랑을 얻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한다.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관계, 진실을 밝히는 순간 깨져버리는 유대. 이는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을 상징한다.


이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물리적으로는 함께 존재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늘 경계선 너머에 서 있다. 바그너는 이들의 고독과 소외를 단지 스토리텔링 차원에서만 그려낸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 대사, 침묵 속에서 이방인의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의 오페라는 관객이 단순히 따라가는 서사가 아니라, 함께 머무는 정서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수한 경계와 마주하고 있다. 국적,언어, 문화, 신분, 외모, 사고방식— 이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다. 바그너가 그려낸 ‘경계인’의 초상은 낡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재현되고 있는 감정적 진실이다. 오페라 속 떠도는 자는 과거의 허구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전쟁을 피해 떠나온 난민, 국적을 잃은 무국적자, 서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이민자들. 그들은 매일 ‘존재의 증명서’를 들고 살아야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국경 앞에서 반복적으로 정체성을 설명해야 한다.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삶은 끝없는 임시 상태이며, 정서적으로는 깊은 고립을 동반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조건부로만 허용된다. 마치 바그너의 선장처럼, 그들은 구원을 기다리지만, 그 구원에는 늘 서류, 자격, 동의라는 이름의 벽이 존재한다.


바그너의 음악은 시대를 초월한다.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며,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를 통찰한다. 그의 오페라는 웅장한 무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요한 싸움을 그려낸다. 그 싸움은 바로 ‘나는 어디에 속할 수 있는가’, ‘누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선장은 매번 같은 질문을 안고 항해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어느 시점에서는 그와 같은 질문을 품고 살아간다. 타인의 사랑, 사회의 인정, 공동체의 수용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그너는 그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떠도는 자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들의 고독이 외면받지 않도록, 그들의 존재가 잊히지 않도록. 그의 오페라는 단지 들려지는 음악이 아니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감정의 기록이다.


결국, 바그너의 이 웅장한 작품들은, 감상하는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조건을 내건 채 누군가를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는가? 그의 음악은 답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 질문이 우리 안에서 오래 울리게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서사시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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