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소년공, '죽을 고비' 넘기고 대권…파란만장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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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소년공, '죽을 고비' 넘기고 대권…파란만장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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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충북에서 유세 중인 이재명 후보(위). 소년공 시절의 이 후보(중). 1982년 중앙대 입학식에서 어머니 고 구호명 여사와 기념촬영한 이 후보. 연합뉴스


성남 이주가정 도시빈민

주경야독 끝에 사법시험 통과

노무현 만나 인권변호사로 

성남시장·경기지사로 존재감 키워 

총선 압승으로 대권 지위 다져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는 이재명(61)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개천에서 용 났다'는 상투적 표현을 고스란히 대입해도 될 만큼 입지전적인 성공담의 주인공이다. 이 후보는 스스로를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라고 할 만큼 철저한 가난을 딛고 일어서야 했다.


최근 펴낸 자전적 에세이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는 어린시절을 기록한 대목의 첫 문장을 '나의 어린시절은 참혹했다'고 썼다.


어머니는 경기도 성남의 시장통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가족은 시장에서 버린 썩은 과일로 배를 채우며 살았다고 한다.


자신을 괴롭혔던 가난은 오히려 생존의 원동력이 됐고, 빈민가의 소년은 밑바닥 삶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해 인권변호사가 됐다.


이어 시민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바꿀 힘이 필요하다며 정치권에 투신, 시장, 도지사를 거쳐 대통령까지 이른 인생은 파란만장한 궤적을 그렸다.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점이나 기성 엘리트 정치인과 차별화된 비주류 성향, 직선적 표현 방식과 승부사 기질 등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도 한다. 실제로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후보를 '전투형 노무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스스로 '법조계에 파견된 노동자'로 살았다고 회고할 만큼 노동자 의식이 뚜렷했다. 이는 개혁적 정치인으로서 '대동세상',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는 정치적 지향점을 낳은 자양분이다.


한편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적 해법을 찾아내는 실용주의와 목표 지향적 성격도 강한데, 이는 가혹한 조건을 견뎌내며 체득한 생존의 원리로 볼 수 있다.


그 덕에 2016년 촛불시위, 2020년부터 이어진 코로나 팬데믹을 거쳐 사법 리스크와 흉기 피습이라는 위기를 딛고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그러나 이 같은 면은 한편으로는 일부 국민에게 불안감과 비호감을 안겨 준 요인이기도 하다.


이제 이 후보는 한편의 불안감을 불식하고 국민통합을 이뤄내는 동시에 비상계엄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수습하고 민생을 회복해야 하는 중책을 안게 됐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안보 환경의 변화에 맞춰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는 물론 글로벌 위기 대응 역량을 키우는 것도 이 후보 앞에 놓인 숙제다.


◇ 빈민 출신 소년공…'쥐어 터지지 않으려' 검정고시 공부


이 후보는 경북 안동의 화전민 가정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이 더 있었는데, 가난 탓에 어릴 적 여의었다.


이 후보는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워야 할 정도로 가난했고, 5㎞ 산길을 걸어야 갈 수 있었던 초등학교에는 자주 결석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976년에 아버지를 따라 경기 성남으로 이주한 뒤에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6년간 소년 노동자로 생활했다.


나이가 어려 법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동네 형 이름을 빌려 위장 취업을 했다.


시계공장에서 스프레이 작업을 하다가 후각이 상했고,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프레스에 왼팔이 끼여 골절상을 당해 그 뒤로 구부러진 팔을 장애로 안고 살았다.


공장 내 폭력에도 시달렸던 이 후보는 이런 삶에서 탈출하려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어 공장 관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당시 공부하며 세운 세 가지 목표는 '남에게 얻어터지지 않고 산다',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산다'였다고 한다.


졸음을 이기려 책상에 압정을 뿌려 놓기까지 하며 주경야독한 끝에 검정고시를 통과해 장학금을 받고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해 교복을 입어 보는 게 꿈이었던 이 후보는 교복이 필요 없던 대학교 입학식에 교복을 사서 입고 갔다.


◇ 노무현 강연 듣고 인권변호사의 길로…시민운동서 좌절 겪어


이 후보는 대학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회의 '거악'을 인식했다고 한다. 이는 공익적 삶을 살기로 한 계기이기도 했다.


다만 캠퍼스 내에 가득했던 민주화 운동의 열기와는 거리를 둔 채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유일한 생명줄이던 대학생 신분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1년 후인 1986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동기로 만난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과는 평생 정치 역정을 함께하는 동지가 됐다.


이 후보의 인생을 바꿔놓은 또 한 번의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노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들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판·검사 경력 없이 변호사 사무실을 열면 생활비나 벌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는 뭘 해도 굶지는 않는다"고 해 용기를 냈다고 한다.


이 후보는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해 철거민과 도시 빈민 노동자들을 돕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95년 성남시민모임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해 시민운동에 발을 들였다.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 의혹을 제기해 주목받았다.


2002년 파크뷰 특혜분양사건 당시 성남시장과의 전화 통화 녹취록을 공개했다가 공무원 자격 사칭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2003년 말 성남 구시가지 종합병원 두 곳이 동시에 폐업한 것을 계기로 벌인 공공의료기관 설립 운동에서 겪은 좌절은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성남시민 20만명의 서명을 받아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조례안이 상정됐지만,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한 시의회가 토론 절차도 없이 47초 만에 이를 부결시켰다.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던 이 후보는 시민들과 거세게 항의하다 특수공무방해죄로 수배되기까지 한다.


이 후보는 이를 계기로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며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 성남시장 시절 파격행보…탄핵정국·2017 대선서 전국구 발돋움


2005년 8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이 후보는 자신의 첫 선거인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고, 2008년 총선에서도 민주당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했다.


2010년 성남시장에 다시 도전해 당선되면서 주목받는 행정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임기 시작 11일 만에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등 파격적 시정 운영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2014년에는 재선에 성공하자 성남 3대 무상복지 정책으로 불리는 청년 배당·무상 교복·공공산후조리 지원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이 후보 스스로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성남시장 시절로 꼽을 정도로 당시의 시정 운영에 애착이 깊다.


당시 추진한 보편복지 정책들은 '기본 시리즈'라는 이 후보의 정책 브랜드로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 같은 행보는 박근혜 정부와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2016년 정부가 지방재정 배분 방식을 변경하자 이 후보는 보편복지 정책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라며 11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이런 활약으로 이 후보는 '변방의 장수'에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서서히 민주당 잠룡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같은 해 11월 시작된 촛불 정국에서 '탄핵'을 먼저 외치며 정치적 몸값이 올랐고, '사이다 발언'으로 더욱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7년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에 도전장을 낸 이 후보는 의미 있는 3등으로 값진 기반을 마련했다.


◇ 경기도지사로 추진력 과시…정권 재창출 실패로 좌절


이 후보는 2018년 지방선거에서 16년 만에 민주·진보 진영 경기도지사로 당선돼 명실상부한 대권주자로 체급을 올렸다.


'기본 시리즈'를 무기로 자신만의 콘텐츠를 쌓았고, 2019년 계곡 불법 점유시설물 정비 과정의 추진력으로 '이재명'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코로나19 당시 방역 지침에 협조하지 않은 신천지 교단에 강제 역학조사를 지시해 대응한 사례로 그만의 이미지는 한층 강화했다.


'친형 강제 입원' 관련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으나, 2020년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고 무죄를 확정받으며 고비를 넘겼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잠룡들이 줄줄이 무너진 가운데 사법 리스크를 털어낸 생환은 그를 유력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2021년 마침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혈투 끝에 이낙연 후보를 물리치고 승리해 본선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이낙연 후보 측이 제기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끝내 본선에서 발목을 잡았고, 윤석열 후보에게 대권을 내줘야 했다.


윤 후보와의 득표율 차이는 0.73%포인트로 역대 대선 사상 최소 득표율 격차였다.


◇ 사법리스크·단식·피습…총선 압승으로 대선주자 가치 증명


대선에서 패한 후보들이 당분간 '휴지기'를 가졌던 전례와 달리, 이 후보는 대선 패배 직후 당 총괄선대위원장으로 2022년 6월 지방선거를 이끌었다.


동시에 자신은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하고자 지역구인 인천 계양을을 비우고 떠나자 그곳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이 후보 자신은 당선되고 당은 참패하자 당내 비명(비이재명)계를 중심으로 대장동 특혜 개발 의혹 등 '사법리스크 방탄용' 보선 출마라는 비난이 일었다.


그런데도 당의 구심점 역할을 할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 속에 2022년 8월 당 대표로 선출된다.


당 대표 취임 1년을 맞은 2023년 8월 31일, "무능 폭력 정권에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국민의힘에서는 사법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단식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실제 검찰은 그 이후 두 번째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9월 23일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돼 이 후보는 다시 한번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9월 27일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며 다시 한번 벼랑 끝에서 살아남았다.


지난해 1월 2일에는 부산 가덕도신공항 부지 방문 도중 목에 칼을 찔리는 습격을 당했다.


동맥 손상을 피해 목숨을 건진 뒤 이끈 총선에서 야권의 압승을 견인하며 대권주자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12·3 비상계엄 당시 야당 대표로 계엄 해제 요구 안건을 통과시킨 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까지 완수한 순간, 사실상 대선 재도전도 확정된 셈이었다.


사법 리스크는 마지막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공직선거법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족쇄를 푸는 듯했으나 지난달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면서 이 후보는 다시 한번 위기를 맞닥뜨렸다.


하지만 파기환송심 재판부와 대장동·백현동 등 개발 특혜 의혹 재판부가 공판 기일을 대선 이후로 미루며 부담을 덜었고, 이 후보는 비로소 대권을 거머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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