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만 아름다운 그들 역사 우리와 비슷해"
[나의 여행기] 한국어 진흥재단 모니카 류 이사장 동남아 여행 <3>
영화 ‘콰이강의 다리’ 나라, 태국
2차 대전 대 일제의 잔악함 부각
일정 안 맞아 촬영지 못간 아쉬움
서른 번의 구테타가 있었음에도
삼권분립으로 민주주의 국가 유지
"암환자 돌봄으로 태국인들과 인연"
이번 동남아 여행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시작해서 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를 거쳐 타일랜드(태국) 방콕에서 마쳤다. 중학교 역사 시간에, 태국이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유럽의 식민지 화염을 피한 나라라고 배웠다. 많은 감명을 받았었다. 그뿐 아니라, 그즈음에 ‘콰이강의 다리’,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라는 두 개의 영화와 ‘왕과 나’라는 뮤지컬 영화가 흥행했는데, 모두 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었다.
‘콰이강의 다리’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세계적으로 흥행해서 1700만달러의 수익을 냈다고 한다. 8개 부문에서 미국 아카데미상 수상, 4개 부분에서 영국 필름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이번 여행 때에 콰이강의 다리를 가 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차편도 불편했다. 수도 방콕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깐짜나부리까지 가야 했다. 이곳이 큰 콰이강(콰이야이)와 작은 콰이강(콰이노이)가 만나는 곳인데, 영화의 이야기는 이곳을 배경으로 한다. 실상 콰이강의 다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의 무성한 산림지대를 연결하는 수 백 개 다리 중의 하나라고 한다. 영화로 유명해진 관계로, 관광지로 변신한 그곳에는 전쟁박물관이 자리하고, 중요한 역사 자료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콰이강의 다리’ 내용은 진실에서 먼 창작물이지만, 당시 영국, 네덜란드 전쟁포로들과 일반인 노동자들이 당했던 일본제국의 잔악한 처우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 이상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살아남은 전쟁포로 중의 한 사람이 ‘참전용사 조찬클럽’이라는 동아리 잡지에 2008년에 발표했다. 종전 후에, 전쟁범죄자로 111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중 32명은 사형선고를 받았을 정도였다.
콰이강의 다리에 관심을 지울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인 ‘참전용사 조찬클럽’ 보고에 의하면, 2차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이 다리를 태국에 팔았다고 한다. 수익금을 주변 국가들과 나누었다고 되어 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였던 영국이, 태국이라는 남의 나라에서, 자국의 군인들이 전쟁포로가 되어 강제노동해야 했던 다리…. 그 다리가 영국 것이었나 의아하였다. 이 다리의 주인은 누구이길래 그런 거래가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이번 동남아 여행은 그들의 역사에 대한 나의 이해가 너무나 피상적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혼란스러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육강식’이 진리라면, 약자의 처지에서 자란 한국의 산물인 나는 인간사의 정의(正義)와 국민을 위하는 국가라는 단체의 정의(定義)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한때는 적(敵)이었던 나라들이, 동맹국이 되기도 하고, 다시 적국(敵國)이 되는 세상이다.
왜 이런 비극을 만들었는지 들여다보니, 미얀마, 베트남, 캄보디아 나라를 다시 차지하여 태국에 포함하려 했던 야망은 태국의 기찻길을 이용해서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육로를 통해서, 쉽게 미얀마를 침략하고, 인디아로 나가려던 일본제국의 그것과 맞아떨어졌다. 태국은 일본의 스테이징 포인트 즉, 활약의 기본 무대로 쓰였다. 동맹은 쉽게 맺게 된다. 조선 땅을 거쳐서 중국과 동남아를 차지하려 하던 일본의 의도와 근본이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태국은 일본과 힘을 합쳐서 영국, 미국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나라이었다.
세상을 뒤엎었던 2차 대전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IT의 개발이었고, 원자과학의 발견이었다. 비밀암호를 깰 수 있었고, 원자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세계에서 30여 번의 쿠데타로 알려진 나라, 태국은 할리우드의 흥행물의 센터 스테이지에도 섰었다.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 상을 당대에 모두 휩쓸었다. 그랬던 작품 중의 하나인 ‘왕과 나’라는 뮤지컬의 내용도 사실과 무관하여서 태국에서는 책은 출판금지이고, 뮤지컬이나 영화 상영도 역시 금지되어 있다
1932년 혁명 때,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었는데 쿠데타로 혼란한 가운데에서도 왕실을 지켰다고 한다. 그들의 왕궁은 황금색으로 치장되어 있어서,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국왕의 옷차림도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길거리 곳곳에서 현재 국왕부부의 사진이 들어간 빌보드를 볼 수 있다(위의 사진). 국왕에게 불미스러운 발언을 하면 불경죄로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삼권분립이 되어 있는 민주주의 국가로 총리가 국정을 주관한다.
태국의 수도 방콕은 번잡하였다. 승용차, 오토바이뿐 아니라, 개솔린으로 움직이는 이 나라 특유의 세 발 타이어가 달린 꼬마 자동차, 툭툭이 사진 참조)가 거리를 메웠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사는 이곳에도 중국인들은 그들만의 타운을 조성하고 있었다. 타이랜드 차이나타운 중에는 삼팽지역(Sampheng) 차이나타운이 잘 알려져 있다. 간판 대부분은 한문으로 쓰인 것이어서, 중학교 때에 한자를 조금 배운 덕에 쉬이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시작되었던 태국과의 인연은 뉴욕주에서 공부를 마친 후 LA에 정착하였을 때 다시 연결되었다. 태국 출신 암 환자들은 내가 동양 사람이라서 좋다고 했다. 태국산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선사하거나, 닭고기를 찹쌀과 바나나 껍질에 싸서 만든 찐만두를 건네곤 했다. 나는 그들의 음식에 매료되었다. 쌀로 만든 국수를 코코넛 주스와 카레에 비벼 만든 파타이, 이란식으로 카레를 섞고 변형해서 만든 마싸만 카레, 익기 전의 녹색 파파야를 한국의 무채처럼 채를 썰어서 특유의 생선 소스로 양념하여 만든 파파야 샐러드는 일품이다.
아프지만, 아름답고, 푸르고, 귀해서 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한국의 그것과 비슷해서, 보관함에 넣어두고 싶은 기억들이다. 이를 다시 들여다보게 한 태국 여행은 지구 반대편이라는 먼 거리라는 단점과 습하고 무더운 기후라는 악조건들을 뛰어넘게 했다. 다녀오기를 잘했다. 태국은 나에게는 인연이 깊다면 깊은 나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