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간증] 예수 없이 못사는 남자 <11>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가슴이 메이다
신승훈 목사
주님의 영광교회
#. 하나님이 먼저 일하신다
93년 1월 선교사로 아프리카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초등학교 3학년 유진, 4학년 윤희를 데리고 선교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와 아내는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었지만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숙사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미 지난 방문 중에 아이들의 입학을 신청해놓은 터였다. 학교 담당자는 시설이 작은데 아프리카 각지에서 입학희망자가 몰리다 보니 대기자가 너무 많다며 우리 보고 기도하라고 조언했다. 마침내 1년 이상을 기다려도 장담할 수 없다던 입학이 4개월 만에 허락되었다. 하나님이 아프리카를 선교를 위하여 모든 일을 하고 계심이 한 번 더 확인되었다. 1993년 1월 3일 미국을 출발 1월 5일에 케냐에 도착한 우리는 그 다음날인 1월 6일에 아이들을 학교로 데리고 갔다. 처음 미국을 떠나 낯선 나라 땅을 밟은 아이들, 부모 곁을 떠나보지도 않았으며 기숙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집으로 오며 우리 부부는 마음이 무거웠으며 아내는 울고 있었다.
#. “나는 내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단다”
어쩌다가 기숙사를 방문해보면 4학년이었던 윤희는 그런대로 기숙사 생활에 적응을 했는데 3학년인 유진이는 옷을 잘 갈아입지 않았다. 한 번 입은 옷을 그대로 늘상 입고 있었다. 몸이 아팠지만 기숙사 사감에게 말을 못해 혼자서 방안에 누워있었던 날도 있었다고 했다.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12 시간을 잠을 재운다고 했다. T.V도 없고 게임도 없고 아무 할 일이 없으니 또 밤에는 위험한 일 (뱀, 야생동물, 강도 등)을 당할 수 있으므로 재우는 것이 최선이었던 것도 이해는 되었다. 한 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면 방안에 아이들이 다 같이 운다고 했다. 학교에 간지 3개월 만에 한 달 방학이 있었다. 개학 날이 다가오자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가는 것을 힘들어했다. 겨우 달래서 다시 학교를 보내던 날 윤희를 기숙사에 내려주고 유진이 기숙사로 가려는데 윤희가 인사를 대충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차를 타고 가며 유진에게 물었다. “누나 이상하지? 아빠가 가는 모습을 보고 인사하고 손을 흔들면서 헤어져야지 인사도 대충하고 그냥 들어가다니? 누나가 너무 했지? 그렇지?”하자 “아빠는 그것도 몰라?”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거였다. “뭘 몰라? 우리가 아빠 가는 모습 보면 마음이 아프지. 그래서 그 모습 안 보려고 그냥 들어가는 거지, 그것도 몰라?” 나는 가슴을 쳤다. 아들을 내려주고 산을 올라오며 한 없이 울었다. 무심코 “하나님 나를 선교사로 부르셨지 아이들을 선교사로 부르셨습니까? 왜 아이들이 이 고생을 합니까? 아이들 희생시켜가며 하는 선교인데 이 선교만큼은 성공시켜주셔야 합니다.” 라며 기도인지 강짜를 부리는 것인지 울면서 하나님께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내 마음으로 들려왔다. “승훈아, 너 지금 네 아이들 죽었냐?” 나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예? 죽지 않았습니다.” 대화가 이어졌다. “그래, 그러면 지금 아이들을 어떻게 했냐?” “예, 기숙사에 두고 오는 길입니다.” “기숙사에는 왜 두었느냐?” “공부하라고요.” “그래, 아이들이 죽은 것도 아니고 공부하라고 기숙사에 두고 오며 그 난리를 치냐? 그 아이들은 네 아이들도 아니고 내 아이들이며 잠시 너에게 맡긴 것뿐이란다.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해서 내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단다. 내가 그 순간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릴 때 세상이 캄캄해진 것이란다. 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한 지 알겠니?” 나는 아들까지 내어 주신 그 사랑에 통곡을 했다. 아들을 희생시키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잊지 않고 그 사랑 안에 살며 그 사랑을 평생 전하겠습니다. 약속을 드리며 산을 올라오던 그날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가슴이 메였었다.
#.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나는 나이로비에 신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절반이 현재 목회자였고 나머지 절반은 교회를 개척할 사람들이었다. 목회자가 많은 까닭에 10주 훈련을 마치고 교회로 돌려보낸 후에 내가 지역을 다니며 숙제 검사와 일주일 세미나를 진행하곤 했다. 한번은 키탈리라는 지역으로 가서 세미나를 했을 때의 일이다. 일주일 세미나가 끝나는 토요일 저녁에 내가 가진 승합차로 학생들을 태워 집 근처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날도 세미나가 끝나서 약 20 여명을 승합차에 태우고 여기 저기 시골길을 다니며 내려주었다. 대개 내려서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집을 가야 하는 것은 차가 다닐 수 없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학생이 남았는데 나는 이런 말을 그에게 하려고 했다. “나하고 같이 키탈리에 나가서 자고 아침에 시골 버스를 타고 들어오는 게 어떻겠니? 지금 너무 늦어 내가 나갈 길을 찾지 못할 것 같아.” 그런데 그 학생이 먼저 내게 말을 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이 가시는 길을 천사가 안내할 것입니다. 쭉 나가다가 왼쪽으로 길이 있는데 그 길로 곧장 나가시면 시내가 나옵니다.” 학생의 그 말에 선교사인 내가 “천사가 무슨 길을 안내해? 같이 가자.” 이런 말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GOD BLESS YOU.” 인사를 하고 나는 그의 말대로 쭉 가다가 왼쪽에 길이 보이는 것 같아 운전대를 틀었는데 가다 보니 길이 막혔다. 뒤로 돌아서 나오는데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난감했다. 여기가 어디냐?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가는데 식은땀이 흘렀다. 가로등은 물론 집에서 나오는 빛 하나 없고 전기도 없는 캄캄한 밤, 게다가 우간다에는 반군이 있고 지척인데다가 강도나 산적까지 있는 아프리카였다. 나는 후회가 막급했다. 자존심은 무슨 얼어 죽을 자존심, 같이 나가자고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강도라도 만나 죽으면 개죽음이지 무슨 순교도 아니고, 기가 막혔다. 한참을 헤매며 운전하다가 보니 멀리 사람이 하나 나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보였다. “차를 세워서 길을 물을까?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강도라면 나는 죽는데, 어쩌지? 그가 영어를 할까?” 많은 생각이 순간적으로 오고 갔다. “어차피 강도면 근처에 강도들이 있을 것이다. 만나서 물어보자.” 그리고는 차를 그에게로 몰고 가서 세워 멀찍이 세우고 그에게 물었다. “혹시 키탈리가는 길을 아세요?” 묻자 “예, 압니다.” 하는 영어 대답이 나왔다. 이 시골에 영어 대답이 나오다니?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내가 조금 전에 가르쳤던 신학생이었다. 둘 다 너무나 놀랐다. “아니 다 차에 타라니까 안 타고 너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학생의 말이 이러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아내와 자식이 한 동안 굶고 있던 차에 세미나가 있다기에 끝나면 나에게 한 20달러의 도움을 청해서 먹을 것을 사가려고 결심하고 참여했는데 나의 마지막 메시지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 이런 말씀을 증거하니 차마 돈을 달라는 말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굶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여 “천천히 걸어서 집에 가자 빨리 가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차를 안타고 일부러 두 시간째 걸어오는 길이며 아직도 세 시간을 더 걸어가야 집에 간다고 했다. 나는 그를 차에 태우고 내가 시내로 혼자서 나갈 수 있는데 까지 같이 가서 그에게 40달러를 주었다. 결과적으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나를 위해 그를 예비하시고 그를 위해 나를 예비하셨다.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다. (계속)
#. 약력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Talbot Theological Seminary M. Div.
1993-1997 동아프리카 케냐 선교사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합동 국제총회 총회장
글로리캠프 코리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