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쓸모 있는 바보, 분별 있는 주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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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쓸모 있는 바보, 분별 있는 주권자

웹마스터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제3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휩쓸고 지나간 2040년의 영국, 거리 곳곳에 카메라와 녹음기가 설치되어 모든 국민이 정부의 감시 아래 침묵과 복종을 강요당한다. 자유로운 정부 비판도 금지된다, 그곳의 통치자는 왕도 총리도 아니다. 파시스트 정당의 대표이자 의회 의장인 셔틀러 총통,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독재자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그린 디스토피아, 완벽한 통제의 미래사회다. 브이(V)는 복수(vendetta) 승리(victory) 비전(vision)을 뜻한다. 


주인공 브이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저항에 나선다. 1605년 11월 가톨릭 신도인 가이 포크스는 의사당을 폭파해 국왕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그러나 브이는 저항에 성공한다. 그는 의사당을 폭파하고, 셔틀러가 최측근인 비밀경찰 대장의 손에 죽은 뒤 자신도 경찰의 총탄에 쓰러진다. 의회의 상징인 빅 벤이 불길에 휩싸이고,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 포성(砲聲)과 종소리를 포르테시모로 울려댄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에서 국정 담당자는 총리와 의회 의원들이다. 그렇지만 민간인을 의회에 불러 호통치거나, 가족과 친인척을 보좌관으로 채용하는 일은 없다. 해마다 의원 세비를 꼬박꼬박 올리지도 않는다. 의원들의 세비가 직장인들 평균 연봉의 절반에 미치지 않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들어앉은 넓고 호화로운 의원회관도, 9명이나 되는 유급보좌관도 없다. 의회가 행정권을 장악해도 나랏일이 불안하지 않은 이유다. 


영국 하원의원은 기피 대상 직업이다. 의원의 직무를 하찮게 여겨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권력과 명예에다 경제적 혜택까지 누리는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아서다. 탄핵제도는 19세기 초부터 사문화되었다. 의회는 내각불신임으로, 총리는 의회 해산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그에 대한 심판은 국민의 투표에 맡겨진다. 정치권이 풀어야 할 국가 현안을 고소‧고발‧탄핵으로 법정에 떠넘기지 않고, 군대의 힘으로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다. 2년에 29회의 탄핵소추도, 그것을 이유로 하는 계엄선포도, 모두 상상조차 못 할 일이다.


한국의 각급 선거관리위원회는 법관이 비상근 위원장직을 맡고 있지만, 영국의 선거관리는 독립된 상근 선거관리관들이 맡는다. 선관위는 선거관리보고서를 작성할 법적 의무를 진다. 선관위 업무가 외부의 감시와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선거관리관이 선관위를 가족회사처럼 생각하거나 자녀 특혜채용을 전통으로 여긴다면, 국민이 주권을 행사한 투표지가 새것처럼 빳빳한 상태로 여러 장이 한꺼번에 붙은 채 발견된다면, 휑하게 구멍 뚫린 소쿠리로 투표지가 이리저리 옮겨진다면, 선거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선관위의 독립성은 업무집행에 있어 사전에 외부의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지, 사후의 감사나 비판까지 면제된다는 뜻이 아니다. 범죄혐의가 있으면 수사를 받아야 하고, 직무집행의 부당성이 의심되면 국회의 국정감사와 독립기관의 감사를 받을 의무가 있다. 지금 대한민국 선관위는 숱한 운영상의 파행으로 공정사회를 바라는 국민의 비판에 직면해있다. 특히 일자리를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에게 깊은 좌절과 분노를 안겨주고 있다. 그동안 국회의 국정감사가 바르게 시행되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브이는 왜 왕궁이 아니고 하필 의사당을 폭파했을까? 의회가 선동정치와 파시즘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끝부분,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시위군중이 의사당 앞에서 모두 가면을 벗어던진다. 국민 누구라도 저항의 브이가 될 수 있다는 암시다. 선악을 거꾸로 뒤집는 정치공작, 분열과 증오를 부추기는 선동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국민의 의무다. 


땅속 깊이 뿌리 내린 민초들의 자유혼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 민주국가에서 자유를 누리면서도 전체주의를 동경하는 지식인을 레닌은 ‘쓸모 있는 바보들’이라고 불렀다. 파시스트에게 쓸모 있는 바보들은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독이다. 쓸모 있는 바보가 될 것인가, 분별력 있는 주권자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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