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에세이] 깊은 상처는 시련을 견뎌낸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흔적(痕迹)이란 단어는 “흉터” 흔(痕)과 “자취” 적(迹)의 합성어이다. 새 번역은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 6:17하)라고 번역했다. (사진은 예수님의 손바닥 위의 못자국을 형상화한 그림)
상처는 우리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이자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것
강준민 목사(새생명 비전교회 담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나이 듦의 좋은 점은 이전에 못 보던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전에 보던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상처입니다. 젊은 날에 받은 상처는 많이 아팠습니다. 무척 힘들었습니다. 상처 받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상처에 이름을 붙여두고 거듭 생각하면서 상처를 덧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상처가 세월이 지난 후에 돌이켜 보니, 저를 키웠습니다. 저를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만들었습니다.
상처받지 않고 목회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깨달았습니다. 상처 없이 살아가는 곳이 있다면 무덤뿐입니다. 무덤에 있는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가장 오랫동안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상처는 제가 연약할 때 받은 상처입니다. 병들었을 때 받은 상처입니다. 실패했을 때 받은 상처입니다. 무너져 주저앉았을 때 받은 상처입니다.
#. 내가 상처로 여길 때만 상처
사람이 건강하고, 잘될 때는 상처를 받아도 상처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이 넉넉한 사람은 상처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상처는 내가 상처로 여길 때만 상처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상처를 주어도 내가 상처로 여기지 않으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상처는 선물과 비슷합니다. 누군가 선물을 주었을 때 선물을 사양하면 그 선물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선물을 가져온 사람이 그 선물을 도로 가져가게 됩니다. 누군가 내게 상처를 주었을 때 상처를 사양하면 그 상처는 상처를 주는 사람의 몫이 됩니다. 제가 너무 쉽게 예를 든 것 같습니다. 상처의 주제를 그렇게 쉽게 단편적으로 다루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상처는 언제나 아픕니다. 나이가 들어도 상처는 여전히 아픕니다. 나이가 들면 어린 아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약해져서 쉽게 오해하고 상처를 받습니다. 나이 듦의 역설입니다. 나이 듦의 모순입니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 갈 수밖에 없다면 어떻게 상처를 적게 받을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피할 수 없는 상처를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상처를 상처로 여길 것인지 아니면 진주로 여길 것인지는, 상처를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반응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상흔(傷痕), 즉 상처의 흔적을 자랑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그는 예수님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흔적(痕迹)이란 단어는 “흉터” 흔(痕)과 “자취” 적(迹)의 합성어입니다. 새 번역은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 6:17하)라고 번역했습니다.
#. 상처가 없다면 예수님이 아니시다
도마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때 그가 보기 원하고 만지기 원했던 것은 예수님의 상흔이었습니다.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상처의 흔적이 없다면 예수님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친절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찾아 오셔서 그에게 상흔을 보여주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 20:27).
상처가 없다면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 속에는 십자가의 상처가 담겨 있었습니다. 상처는 사랑의 흔적입니다. C. S. 루이스는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랑하면 당신의 마음은 조여질 것이고, 어쩌면 부서질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면 약해집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하면 가슴앓이를 합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받는 상처는 보석입니다.
#. 상처는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
상처는 우리가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모험했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상처를 낳습니다. 실패는 시도했다는 증거입니다. 도전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실패는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배움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디딤돌입니다. 상처는 우리가 헌신했다는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헌신을 비난합니다. 헌신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극찬 하십니다. 옥합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상처를 내야 합니다. 옥합을 깨뜨린 상처가 없으면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할 수 없습니다(요 12:3). 고귀한 상처는 향기를 발합니다.
상처가 없으면 꽃도 없습니다. 꽃은 상처 사이에서 피어납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랜드 캐년의 아름다움은 상처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합니다. 상처가 클수록 더욱 아름답고, 더욱 영광스럽습니다. 상처가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상처는 치유됩니다. 상처는 영광이 됩니다. 시련을 견뎌낸 깊은 상처는 아름다운 흔적이 됩니다.
프로필
서울신학대학 졸업(B. A.)
아주사 신학대학원(Azusa Pacific University, M. A./ M. Div.)
탈봇 신학교(Talbot Theological Seminary, Th. M.)
KOSTA(국제 복음주의 학생 연합회) 강사
미주 두란노서원의 큐티 세미나 강사
LA 소재 로고스 교회 담임 목사
LA 동양선교교회 담임목사
새생명비전교회(New Life Vision Church) 담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