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쪼개진 美 정치… 공화 "USA" 환호, 민주는 야유
4일 워싱턴 DC 연방 의사당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상·하원 합동 연설을 듣던 민주당 의원들이 다양한 문구가 쓰인 항의의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트럼프 연설서 극명하게 갈려
기립 박수와 항의 팻말 뒤섞여
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들어 처음 열린 상·하원 합동 연설은 양극화된 미 정치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트럼프는 2000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세운 1시간 28분 기록을 넘어서서 역대 최장인 100여 분간 자화자찬을 쏟아냈다. 민주당 의원들이 소리를 지르다 쫓겨나거나 미리 준비한 항의 팻말을 들고 야유를 보내는 통에 현장은 내내 어수선했다. 트럼프의 연설이 길어지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중도 퇴장하기도 했다.
이날 하원 본회의장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부활’을 주제로 이어진 트럼프의 연설은 “미국이 돌아왔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취임 이후 6주간의 성과를 홍보하는 데 집중됐다. 국정 운영을 위해 통합과 협치를 호소하는 메시지는 거의 없었다. 트럼프는 “많은 이가 우리가 취임 첫 달에 이룬 성과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직 수행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며 “2위가 누구인지 아느냐. 바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라고했다. 미 언론은 “선거 유세와 의회 연설의 경계가 무너졌다”고 평가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연달아 환호하며 기립 박수를 치는 동안 민주당 의원들은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청중의 절반은 일어나 있고 나머지 절반은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계속 잡혔다. 트럼프는 “이번이 내 다섯 번째 의회 연설인데, 내가 최악의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아내거나 전 세계를 휩쓰는 전염병을 종식시킨다 해도 이 사람들(민주당원)은 절대 박수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연설 시작 약 5분 만에 흑인인 민주당 앨 그린 하원의원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트럼프를 향해 지팡이를 겨누며 “당신은 권한이 없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정부 지출 감축을 추진하는 트럼프가 메디케이드(저소득층 대상 공공 의료보험) 예산을 삭감할 것이라는 우려가 민주당 안팎에서 제기되는 가운데, 트럼프에게 삭감 권한이 없다고 항의한 것이다. 공화당 의원들이 그 목소리를 묻어 버리려는 듯 “USA(미국)!, USA(미국)!”를 연호하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결국 그린 의원은 퇴장당했고 트럼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트럼프는 연방 공무원 감축 성과를 설명한 뒤 “무책임한 관료 조직으로부터 권력을 되찾고, 변화를 거부하는 연방 관료는 즉시 해임할 것”이라며 “미국은 더 이상 선출되지 않은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대목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일제히 방청석의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수장을 쳐다 봤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최측근으로 꼽히는 머스크야말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의미다. 지난달 티셔츠 차림으로 백악관 내각 회의에 참석했던 머스크는 이날은 정장에 넥타이를 맸다.
트럼프가 순직 경찰관의 가족들을 위로하며 “경찰의 일이 이렇게 위험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땐 민주당 쪽에서 “1월 6일”이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트럼프의 2020년 대선 패배를 부정하는 극성 지지자들이 이듬해 1월 6일 연방 의사당을 습격해 경찰관이 사망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민주당은 다양한 글귀가 쓰인 팻말을 트럼프의 연설 중간 중간 들어 올리며 항의를 표시했다. 트럼프가 사실과 다른 발언을 하면 ‘FALSE(거짓)’ 팻말을 드는 식이다. 트럼프가 전제 군주처럼 전횡을 일삼는다는 의미의 ‘NO KING(왕은 없다)’, 선출되지 않은 머스크가 과도한 권력을 휘두른다는 의미의 ‘MUSK STEALS(머스크가 훔친다)’ 팻말도 나왔다. ‘훔친다’는 2020년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트럼프 측에서 민주당이 선거 결과를 도둑질했다고 주장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방청석의 일부 민주당원들이 등에 ‘RESIST(저항)’라고 쓰인 옷을 입고 트럼프를 향해 등을 돌리는 장면도 포착됐다. 민주당 여성 의원 30여 명은 트럼프의 가족·여성 정책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단체로 밝은 분홍색 정장을 입었다. 2020년 당시 민주당 소속 하원 의장으로서 트럼프의 집권 1기 국정연설 원고를 카메라 앞에서 찢어버렸던 낸시 펠로시 의원도 분홍색 정장 차림이었다.
워싱턴=박국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