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 희망가 '해뜰날', 그의 삶이 '울고 웃는 인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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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대 희망가 '해뜰날', 그의 삶이 '울고 웃는 인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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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트로트 가수송대관이 별세했다. 78송대관은 1967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해 1975 '해뜰날'이 히트하며 인기 가수로 도약했다


트로트 국민 가수 송대관 별세, 먼저 떠난 모친과 같은 날 하늘로

"쨍하고 해뜰날"로 인생 역전, '차표 한장' '네박자' 등 히트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1975년은 고단했다. 오일쇼크가 정점에 달해 먹고살기 힘들었고, 긴급조치 7호가 내려졌다. 그해 7월 오아시스 레코드사는 ‘중고 신인’ 송대관의 음반을 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이듬해 말까지 음반은 2만장밖에 안 팔렸지만, ‘해뜰날’은 온 국민이 부르는 메가 히트곡이 됐다. “쨍 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하는 김연자의 코러스로 시작하는 노래는 산업 개발 시대의 노동요이자 희망가였다.

 

50년 전, ‘쨍’ 하는 노래를 들려준 가수 송대관이 7일 오전 급작스럽게 별세했다. 79. 송대관씨 가족은 “6일 컨디션이 갑자기 악화돼 7일 새벽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송대관은 몇 해 전 담도암을 이겨냈지만 이후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노래’로 쌀가마니 타오던 아들

 

1946년 전북 정읍시 태인면에서 태어난 송대관은 가난한 집안의 노래 잘하는 아들이었다. 조부 송영근 선생은 1919 3·1운동 직후인 3 16일 태인면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징역을 살고 44세로 타계했다.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송대관의 부친은 6·25 때 실종됐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이” 어머니 손에 자랐다. 고교 시절, 가요 콩쿠르 대회에 나가 쌀 한 가마니, 돼지 한 마리를 상으로 받아왔다. “집안 살림에 겁나게 보탬이 됐지. 남들은 입시 공부할 때 나는 팝송 가사 외우며 가수가 될 꿈을 키우는 게 당연했지.


1965년 전주 영생고 졸업 후 상경, KBS ‘가수탄생’에서 연달아 3회나 우승했다. 오아시스 레코드사와 50만원에 계약한 후 1967년 ‘인정 많은 아저씨’로 데뷔했다. 바느질로 가족을 부양하다 병을 앓던 어머니 국갑술씨를 생각하며 가사를 쓴 1971년 곡 ‘세월이 약이겠지요’(당신의 슬픔을/ 괴롭다 하지 말고/ 서럽다 울지를 마오)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모친은 지난 2016 2 7일 별세했다. 그 아들 송대관도 같은 날, 어머니를 따라갔다.

 

1975년 답십리 굴다리 옆 단독주택 문간방에서 송대관은 자기 인생을 생각하며 가사를 썼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지나간다/ 떠도는 놈이라 괄시 말아라/ 쨍 하고 해뜰날 있을 거니까’ 송대관은 “쓰고 나서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글이 너무 잘 나와 새벽 4시에 미친놈처럼 웃었다”고 했었다. “신 선생, 나도 한번 떠야것소. 밀어주셔잉.” 작곡가 신대성이 곡을 붙이고, 원래 가사를 수정해 ‘해뜰날’이 나왔다.

 

◇답십리 문간방에서 새벽에 쓴 가사 “쨍하고 해뜰날”

 

노래 한 곡으로 인생이 역전됐다. 대마초 사건으로 굵직한 가수들이 구속된 공백의 가요계, 송대관이라는 ‘블랙홀’로 모든 빛이 빨려들었다. 1976년 그는 방송사 ‘가수왕’이 됐고, 동명의 영화까지 나왔다. 77년에는 네 살 연하 무용가 이정심씨와 결혼했다.

 

‘컬러 방송’은 그의 인생에 먹구름을 몰고 왔다. “사람들이 극장식 쇼에 와서 가수 얼굴을 봤는데, 컬러 방송이 나오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직장이 없어진 거다.” 미국 이민자인 처가에서 초청장을 보내줘 워싱턴으로 이주한 것이 1980. 초기에는 고생했지만 그 또한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정신으로 극복해 점포를 10개나 갖게 됐다. 그러다 찾아온 등의 통증. 원인을 찾지 못하자 의사가 말했다. “향수병 같다.” 송대관은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한 울부짖음이 있었던 것 같았다”고 했다.


1988년 귀국, ‘혼자랍니다’ ‘정 때문에’로 컴백에 성공하고, 이후 ‘차표 한 장’, ‘인생은 생방송’, ‘고향이 남쪽이랬지’ 등 노래를 냈다 하면 히트 행진이었다. 1998년 발표한 ‘네 박자’로 KBS 가요대상 본상, 올해의 가수상을 받았다. 가히 ‘돌아온 송대관의 시절’이었다.

 

매니저 3명을 두고 잘나가던 2009년 이른바 ‘부동산 사기 사건’에 얽힌다.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부인이 극단적 선택을 고려할 만큼 인생이 추락했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2000년 들어서도 히트곡을 냈다.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나도 한번 불러본다’로 시작하는 ‘유행가’는 부인 이정심씨가 작사한 노래로 송대관은 화려한 의상에 ‘엇박자 댄스’를 곁들여 젊은 층까지 사로잡았다.

 

◇“누나 신곡이 너무 잘 나왔어. 내 걱정 마쇼잉”

 

갑작스러운 죽음에 가요계는 충격에 빠졌다. 송대관과 ‘바늘과 실’로 불렸던 태진아는 “아침 밥숟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며 “송대관 선배는 내 인생의 동반자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부부가 평생 인연을 맺어온 김상희씨는 “자기 주관이 뚜렷한, 깔끔하고 대찬 사람”이라고 했다. 얼마 전 연락해온 송대관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누나 신곡이 너무 잘 나왔어. 내 걱정 마쇼잉.

 

유족은 부인 이정심씨와 아들 진형, 진석씨. 장례는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이다.

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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