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영의 마음산책] 심리적 안전감과 대통령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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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의 마음산책] 심리적 안전감과 대통령 리더십

웹마스터

권수영

연세대 교수

한국상담진흥협회 이사장


지난 연말 한국 대기업의 중간관리자로 근무하면서 서울 시내 대학에서 MBA를 하는 이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재학 중인 MBA 프로그램에 필자가 특강을 갔다가 만난 이들이었다. 그들은 흥미로운 주제로 기말 프로젝트를 하면서 내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주제는 기업 내 ‘조용한 퇴사자(quiet quitter)’들에 대한 것이었다. 조용한 퇴사자란 직장에서 퇴사한 상태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업무만 처리하면서 회사에 기여하려는 의지가 거의 없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지난해 한 설문조사에서는 직장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용한 퇴사’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52%가 현재 ‘조용한 퇴사’ 상태라고 답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대한민국 직장인 절반이 조용히 퇴사 중이라면, 국가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대 갈등 이슈를 최근 조직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라고 여기는 기업의 리더들이라면 바로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자)가 이런 조용한 퇴사자일 것이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조용한 퇴사’에 대한 설문조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연차별로는 8∼10년차(57.4%) 직장인들의 응답률이 가장 높았다. 이어 5∼7년차(56.0%), 17∼19년차(54.7%) 순이었다. 20년 가까이 직장에 몸 담고 있는 이들의 절반 이상이 조용한 퇴사 중이라고 보고하는 것을 보면 이 문제를 그저 세대차이로만 보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인지 깨닫게 한다.


필자는 이번 달 한국의 한 대기업으로부터 신임 임원들과 신임 부사장들에게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기업의 요청한 강연 주제는 ‘심리적 안전감과 리더십’이었다. 최근 글로벌 경쟁에서 밀리면서 경영 위기를 맞은 이 기업이 위기의 주 원인으로 진단한 것은 다름 아닌 자율성과

도전의식이 사라진 비효율적인 조직문화였다. 


자율성과 도전의식이 사라진 이유는 왜일까? 구성원들 개인의 문제일까? 앞서 언급한 대로 몸은 조직 안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조직을 떠나있는 ‘조용한 퇴사자’들이 많아진 것도 바로 조직 내에서 심리적인 안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구성원들이 어떤 의견과 생각을 개진해도 수용되지 않는 환경은 결국 구성원들의 마음이 조직과 멀어지게 만든다. 


글로벌 혁신 기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기업도 조직 내 심리적 안전감이 부족하면, 여지 없이 추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심리적 안전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꼭 기업의 리더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 리더십에 대한 평가도 국민들이 느끼는 심리적 안전감과 무관하지 않다. 


탄핵소추된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초기 국민들과 자유롭고 격의 없는 소통을 약속하면서 출근길 도어스태핑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약속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입틀막’ 행보가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행사장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국회의원의 입을 틀어막고 끌어내기도 하고, 국내 최고 공학 분야 인재들이 모여있는 대학교 졸업식장에서는 졸업생을 위장한 경호원들이 졸업생 한 명을 사지를 들어 졸업식장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에 재직하는 필자는 다시 80년 대 사복형사들이 캠퍼스를 돌아다니던 공안정국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통령의 공포정치는 국무위원들에게도 분명 영향을 미쳤으리라 예상된다. 그가 계엄을 선포한 밤, 심의를 위해 모였던 11명의 국무위원들은 몹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경제와 외교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우려하면서 말리는 국무위원들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내란과 외환이 아닌 상황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지적을 단 한 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정부가 되었다면, 심리적 안전감이 전혀 없는 조직으로 전락했다는 증거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기업이나 어떠한 조직도 더 이상 외부적인 평가나 가시적인 성과로만 리더의 자질을 평가받는 시대가 아니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리더의 가장 핵심적인 역량이다. 모든 구성원들이 안전하게 느끼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대통령 리더십도 예외는 아니다. 하루 속히 국가 전체에 드리워진 불안을 걷어내고 안전한 국가로 만드는 일이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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