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간증] 예수 없이 못사는 남자 <6> -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 같이 입학한 신학교와 아프리카 선교사 감동
주님의 영광교회 신승훈 목사
내가 주의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놀랄 일이었다. 나의 친구들이나 친지들도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의 종이 된다는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일생 동안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이제는 내가 좋을 때는 물론 싫어도 자의든 타의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영혼이 돌아오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이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평생을 하나님의 일을 하겠구나.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구속 주 하나님, 그 분의 길을 가는 것은 분명히 인생에 있어서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있던 사업들을 정리했다. 비디오 가게들은 이미 정리했고 원 아워 포토들도 정리하고 하나만 남겨두었다. 사업을 정리한 돈을 가지고 부동산에 투자했다. 내가 살고 있던 집 말고 네 채의 큰 집들을 샀다. 지금 생각해도 일생 일대의 실수였고 교만이었다. 나의 계획은 내가 신학교를 마칠 무렵 집들을 팔아 백 만불 이상을 내가 개척하는 교회에 헌금하리라 결심했었다. 담임목사가 교회를 개척하며 백만불 헌금, 그 때가 88년 초니까 백만불은 큰 돈이었고 얼마나 근사한 이야기인가? 뿐만 아니라 “내가 담임할 교회에다가 헌금해야지 왜 지금 섬기는 이 교회에 헌금을 하나?” 이런 생각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뜨겁다. 지금 내가 섬기는 이 하나님이 내가 개척할 때 그 하나님인데, 지금 이 교회에서 섬기는 하나님이 그 개척 교회의 하나님 이신데, 나의 생각과 교만이 앞서있었다. 얄팍한 생각이었다. 하여간 그 돈들은 다 날라갔다. 90년초에 부동산이 바닥을 치면서, 렌트비를 안 내는 입주자들을(못 냈는지 안 냈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약해서 내 보내지도 못하고 모든 페이먼트를 그냥 혼자 감당하던 차에 집값은 떨어지고 전도하고 교회 일 하느라 렌트비 받으러 다닐 정신도, 마음도 없었다. 돈을 다 잃고 나니 “그 돈을 하나님께 드렸어야 하는 건데”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의 무지와 교만 때문에, 나를 가르치시려고 미국 전체에 부동산 불황을 주셨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우선 신학교를 가야 하는데 어디를 가야 할 지 몰랐다. 나는 원래 신앙 배경이 없던 사람이다. 교단도, 신학교도, 교리도 몰랐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Talbot 이라는 신학교가 있었는데 마침 나의 담임 목사님이셨던 김광신 목사님께서 졸업하신 신학교였다. “왜 이 학교에 오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나의 대답은 “집에서 가까워서”였다. 많은 교단이 있고 교단마다 신학이 다르고 신학교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들을 입학 뒤에 알게 되었다. 입학을 하려고 안내 서류를 보니 토플 550 점을 받아오라고 했다. 공부 끝난 것이 10년도 넘었는데, 무슨 토플? 그것도 550점이나? 나는 입학 담당자를 찾아갔다. 차를 파킹 장에 세우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미국 신학교에 다니고 싶습니다. 영어도 배우고 폭넓게 신학과 신앙도 배우고 싶습니다. 들어가게 해주세요.” 담당자의 말이 “학교 규칙이니 토플을 받아 가지고 오라”고했다. 나는 “왜 그런 규칙을 만들었냐”고 되물었다. “자기들의 경험에 의하면 토플 550점을 받아야 학교 공부를 따라 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때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간증했다. “나는 사업하던 사람이다. 사업가에게는 시간과 돈이 생명이다. 내가 강의 듣다가 못 알아들으면 내가 자진해서 학교 그만 둔다. 나는 영어 단어 외울 시간이 있으면 전도하거나 성경 보거나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그 때 그 담당자가 말했다. 한 학기 강의를 들어보고 그 뒤에 말하자고 했다. 그래서 입학이 되었다. 나는 이 간증을 다른 사람들에게 했다. 그 학교가 생긴 이래로 대학을 미국에서 졸업하지 아니한 대학원 신입생 중 토플 없이 입학한 사람은 내가 최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 뒤 나의 간증을 듣고 그대로 따라 했던 학생들이 3 명이나 입학을 못한 이야기를 나는 들었다. 왜 날 사랑하시나? 능력 없고 실력 없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무식하고 용감한 내가 불쌍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된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고 어떤 교수들에게서는 많은 감동을 받았지만 어떤 과목은 쓸데없는 공부를 하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아까웠고 또 어려운 과목은 따라가기가 내게는 너무나 벅찼다. 졸업에 필요한 96 유닛 중에 2/3 정도가 끝난 입학 2 년 후에, 힘도 들고 시간도 아깝고 다른 일도 많고 해서 나는 학교를 그만 두고 말았다. 공부하느라 교회 일을 잘 못하는 것이 못 마땅했던 차라 마음껏 교회 일을 하자는 의도였다. 덕분에 그 당시 나는 선교부 디렉터(director)였으므로 공부 때문에 못 다니던 선교지를 마음껏 다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원 없이 하니 마음이 너무 좋았다. 그러기를 일 년 반, 담임 목사님께서 공부를 끝내라고 하셨다. 물론 휴학을 할 때도 허락은 받았지만 공부를 일단 끝내고 교회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또 내 귀에 들리는 소리에 “영어도 잘 못하는 주제에 무슨 미국 신학교? 실력이 없으니 그만 두었지, 왜 교회 일 핑계를 대“ 내가 영어를 잘 했으면 그 말을 무시했을 텐데, 오기가 생겨서 다시 입학을 하고 92년 12월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누가 그 말을 했는지 지금 와서 보니 감사한 일이다. ‘오기’로 졸업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졸업 2 주일 만인 이듬해 1월 3일에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는데 그 사연이 이렇다.
나는 선교국 디렉터로 많은 선교지를 다녔다. 기억하는 것만도 50 여 나라 이상이다. 선교지를 갔다 올 때마다 하는 생각은 “나는 선교사 절대 안 한다. 목회 잘해서 선교사를 돕는 목회한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목회 준비만 했다. 선교지에서는 마음이 무겁고 방문 후, 그곳을 떠나려고 비행기를 탈 때는 마음이 시원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뒤집어지는 일이 있었다. 사정은 이랬다. 생각지도 않게 아프리카 목사가 교회를 찾아왔다. 이후 아프리카에서 편지가 왔다. 또 네덜란드에 있던 우리 교인이 아프리카를 가게 되었다. 다른 나라 선교를 준비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수석 부목사님이셨던 안 동주 목사님과 선교부 책임자였던 나는 아프리카를 하나님만 의지하고 방문하게 되었다. 우간다를 가기 위해 케냐공항에서 8 시간을 기다리던 중 나는 안 목사님과 공항 밖을 나가서 택시를 잡았다. 나이로비 시내를 구경하자고 했더니 동물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이곳 말고 사람 사는 것을 보여달라고 했다. 민속촌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이런 것 말고 진짜 사람 사는 곳을 가자고 했다. 택시 운전사는 한 언덕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50만명이 사는 빈민가. 나는 거기서 무너졌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는가? 무지, 가난, 질병 등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미국에 사는 것이 이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후에 우간다에서 만난 목사들이 말했다. “우리를 좀 가르쳐주세요. 은혜 받아 목사가 되었지만 신학교를 다니지 않은 목사가 90% 이상입니다.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그러나 나는 부족할 지라도 이들과 기도는 할 수는 있다. 같이 울어줄 수는 있다. 43세가 평균 수명인 이들, 고생하며 사는 것도 억울하지만 이렇게 살다가 죽어서 지옥가면 너무 억울하다. 여기로 와야겠다는 감동이 왔다. 그런데 나의 감동을 들으신 담임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말리셨다. “안됩니다, 신 전도사님은 목사님 옆에서 목사님을 도와드려야지요.” 아내도 놀라고 부모님도 아프리카라는 말에 너무나 놀라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