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칼럼] 아우성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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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칼럼] 아우성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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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

Houston Fearless 76 이사장

 

내게 아우성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친구들이 그 진의를 얼마만큼 아는지 모르겠기에 이 별명 속에 내재된 의미를 스스로 끌어내어 보았다. ‘아우성이 주는 뉘앙스는 긍정 에너지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천진하게 행동하는 것이고 고뇌가 있어도 미소로 표현하는 속 깊은 행동이다. 아우성의 첫째 조건은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어떤 식으로든 동질적이고도 근원적인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그들 속에서 아우성을 치려면 우선 심신이 건강해야 한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지치지 않는 애정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불특정 타인을 위해 결코 낭비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에 앞서 필수 조건이 한가지 있다. 친화적인 성품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비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우성을 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누가 그의 말을 따르겠는가.

사람들과 어울릴수록 에너지가 박탈된다. 사람마다 케미컬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이벤트에는 늘 크고 작은 마찰이 있기 마련이어서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모된다. 그 에너지가 끊임 없이 솟아 올라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많은 일들을 도모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 세상은 음양의 세계, 정중동(靜中動)과 동중정(動中靜)의 세계로 유지된다. 한쪽 면이 있으면 반드시 그 이면이 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다. 산이 높을수록 깊은 골짜기와 물이 있다. 기다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호수 위에 떠서 먼 산의 능선을 바라보는 고고한 학을 보라. 물 밑에서 아우성치는 그 학의 두 다리를 보라. 동중정(動中靜)이다. 이 세상은 정과 동이 어울려 하나가 됨으로써 조화를 이루고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내 아우성을 동()이라고 한다면 그 이면은 정()이다. 그러니까 내 아우성의 비결은 고독이다. 홀로 갖는 성찰의 시간이다. 그 중 가장 귀한 시간이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고해하고 그 시간을 통해 다친 영혼을 치료하며 상처 난 날개를 어루만지는 시간이다. 이른 아침에 정갈한 자연을 대하며 심호흡을 하면서 아우성의 기도를 드리는 이유다. 이렇게 축적된 힘으로 세상으로 나간다. 그리고 또 세상을 향해 아우성을 친다. 내 아우성은 사실 외로움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비즈니스로 만나 멋진 미국인들과 오랜 세월 교류하고 있지만 그들과는 때로 등짝도 쳐 가면서 농담 할 수 없다. 한국어만이 가진 깊은 속내를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아우성은 어쩌면 그 쓸쓸한 속내를 달래기 위한 방책인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힘이 다하는 날까지 아우성을 치고 싶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울리고 싶다. 끝까지 아우성으로 남고 싶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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