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사역지와 사역자를 찾아서] GMU 박사원장 이병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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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사역지와 사역자를 찾아서] GMU 박사원장 이병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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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현장 경험으로 선교사들 도와

불신자 가정 출신 ··· 수련회 통해 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나

 

   이병구 교수는 불신자 가정에서 성장했다. 5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소년 이병구는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에 참석하면서 교회 생활을 시작했다. 교회가 좋았고 친구가 좋아서 즐거운 교회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여름 수련회를 참석하게 되었다. 별생각 없이 참석한 여름 수련회에서 소년 이병구는 예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다. 담당 전도사님께서 “이번 수련회 가장 큰 수확은 이병구의 변화다.”라고 할 만큼 이병구는 변화되었다. 주일학교 보조교사, 성가대 대원이 되었고, 가족 구원을 위해 새벽기도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신앙을 키워주신 박영숙 전도사님을 잊지 못한다. 전도사님은 평생 홀로 사시면서 어린 영혼들을 양육하신 훌륭하신 분인데, 어려운 불신 가정에서 홀로 교회 출석하는 이병구 소년을 따뜻하게 품어 주셨다. 사실 그 시절 소년 이병구는 집안에서 많은 핍박을 당했다. 성경책이 찢겨지기도 하고 아버님과 큰 형님으로부터 심하게 야단을 맞았지만,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님의 사업이 기울어 어려운 가정이어서 이병구 소년은 고등학교 시절 일을 했다. 큰 형님이 운영하는 콩나물 공장에서 일하며 학교에 다녔다. 새벽 일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학교를 마치면 자전거로 한 시간 거리를 달려 콩나물 공장에서 일했다. 그 어려운 시절을 믿음으로 이겼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수련회에서 목회자가 되기로 헌신했다. 그런데 큰 형님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입원했다. 형님은 크게 다치고 40일간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돌아가셨다. 큰 형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40일동안 아침을 금식하며 형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 형님의 사망은 어린 조카들, 형수 그리고 동생인 이병구 소년 모두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남겼다.

   밀린 등록금을 내지 못해 졸업도 어려웠으니 대학 진학은 생각조차 못 했다. 아픈 마음을 갖고 수양산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방언도 받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음성도 들었다. 환희와 영광을 경험했다 그 이후 불행감이나 열등감이 전혀 없다.

   그 후 청년 이병구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경제문제도 해결되고 신학교 진학도 했다. 신학교에 진학 후 군대를 위해 기도하며 군종병이 되기를 기도했다. 곧 입대했고 우여곡절 끝에 독립군인교회 담당 군종병이 되었다. 군종목사님이 못 오실 때 예배를 인도하는 그야말로 담임 군종이었다. 최선을 다해 섬겼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큰 은혜와 축복을 경험한 군생활이었다.

   칼빈대학교와 총신대 신대원을 마치는 동안에도 은혜와 축복의 연속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안수를 받고 선교사가 되어 남인도 뱅갈로르지역에서 보낸 16년은 이병구 선교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를 몸소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선교했다. 선교사의 경험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싶어 2013년 안식년에 풀러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박기호 박사님의 지도로 학위들을 마쳤다.

   2016년 확장일로(擴張一路)에 있던 그레이스미션대학교에 박사원 교수진으로 합류했다. 이병구 박사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선교 현장을 누비는 선교사들이 신학과 현장 경험을 종합하여 정리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시작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결실을 주셨고 지금은 박사원을 책임지는 박사원장으로 섬긴다. 기도대로 선교사들을 섬기며 박사원도 발전하고 있어 감사하고 있다.

강훈 종교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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