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선의 아메리칸 드림] 블루 북(BLUE BOOK) 유감(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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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의 아메리칸 드림] 블루 북(BLUE BOOK) 유감(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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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

Houston Fearless 76 이사장

 

대학원 공부를 하는데 어떤 클래스는 정말 힘들었다. ‘HUMAN BEHAVIOR’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주어진 아젠다에 대한 토의를 했다. 교수는 뒤에 앉아 학생들이 토의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학생 각자에게 점수를 매겼다. 이 학과 때문에 마음고생을 무척 했다. 다른 과목은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니까 큰 문제 없이 따라갈 수 있었는데 이 과목은 도대체 어찌해야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 알고는 있지만 물리적으로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으니 더욱 고달팠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미리 주어진 아젠다에 대해서는 철저히 준비를 했기 때문에 주제 발표는 무난히 할 수 있었다. 문제는 토의 시간이었다. 상대방이 하는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I beg your pardon?”, ‘Could you speak slowly again please?”를 반복했다. 이러한 말을 자주 해야 하는 나 조차도 매우 민망했다. 정말로 힘든 과목이었다.

다음 강의 시간에 시험을 친다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낭패를 당한 적도 있다. 하루는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Blue Book’이라는 공책이 모든 학생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시험 시간이라고 했다. 모두들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교 서점에 가서 블루 북을 사 가지고 왔는데 나만 아무 준비 없이 강의실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는 감정을 느꼈다. 시험공부는 고사하고 시험을 본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슨 시험을 이렇게 치르나 싶었다. 객관식 문제가 프린트 된 시험지도 없고, 주관식이라 해도 한두 문제가 적힌 A4 용지가 적어도 배부되어야 하지 않는가. 시험지를 학생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니 난감하기가 그지 없었다. 옆에 앉아 잇던 학우가 여분으로 가져 온 블루 북 한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블루 북이 시험지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블루 북은 줄이 쳐진 노트로 거기에 교수가 칠판에 제시하는 타픽(topic)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주어진 시간 안에 기승전결로 조리 있게 쓰는 것이다. 심장이 요동쳤다. 이 시험에서 낙제점수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상심이 컸다. 그래도 정신을 집중해서 최선을 다하자 마음 먹고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 생각을 차분하게 풀어나갔다. 끙끙대다가 시간이 끝나서 블루 북을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제출했다. 성적표를 받아보니 의외로 B 플러스였다. 놀라서 교수님을 찾아갔다. 답안지를 절반도 채우지 못했는데 이렇게 좋은 점수를 주었으니 교수님이 혹 실수하셨는지, 아니면 다른 학생과 혼동을 하신 것은 아닌지 확인하러 왔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교수님께서는 길이가 다소 짧기는 하지만 요점을 제대로 썼다면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가슴 아픈 일이 많았다. 마지막 학기였는데 어느 날 저녁에 아내는 일을 가고 나는 제출해야 할 숙제를 타이핑했다. 숙제가 길어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쓰러져 깜박 잠이 들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 보니 어린 제임스가 내가 정성 들여 타이핑 해놓은 종이 위에 연필과 크레용으로 여기저기 선과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구겨놓았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아이를 옆으로 밀쳐 버렸다. 서럽게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인간이 제 자식에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어 심히 고통스러웠다. 나는 밤새워 타이핑을 다시 해서 다음 날 학교에 무사히 제출했는데 지금도 대학원 시절은 여러 추억으로 남아 있다. 유학을 생각하는 분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나의 글블루 북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준비를 잘 하시기를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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