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건국사를 잊어버린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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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건국사를 잊어버린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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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개척정신과 인고(忍苦)의 투혼으로 굳게 뭉친 제1세대는 황야처럼 거친 여건 속에서도 확고한 연대의식으로 힘겹게 나라를 세운다. 그 뒤를 잇는 제2세대는 물려받은 나라의 기틀 위에서 번영과 발전을 추구하지만, 안정과 평화가 주는 안일 속에서 앞 세대의 연대의식을 잃어버리고 권력투쟁과 내분으로 국가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그러다가 제3세대에 이르면 선조들이 어떤 역경 속에서 어떻게 나라를 세우고 일으켜왔는지를 깡그리 잊은 채 이기주의와 향락풍조에 빠져 연대의식을 상실하고 결국 나라의 파멸을 맞게 된다."


14세기 아라비아 역사가 이븐 할둔이 『역사서설』에서 밝힌 국가흥망의 모습이다. 국가수명론(國家壽命論)이라 부를 수 있겠다. 나라의 바탕은 국가 구성원들의 강력한 연대의식에 있다는 것이 할둔의 통찰이다. “국가는 자살이 아니고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에머슨의 촌철살인이다. 진정한 위기는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에서 온다. 특히 지도층의 분열은 공동체의 밑뿌리를 갉아먹고 국가운명에 치명적 위기를 초래한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아도, 지도층이 투철한 연대의식의 중심에 자리잡고 통합과 조정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는 나라의 진로가 순탄했지만, 정치인들이 서로 반목하고 사분오열했을 때는 온 민족이 가시밭길을 헤매야했다. 지난 세대의 한국은 선진국들이 수백 년에 걸쳐 겨우 이뤄낸 산업화·민주화를 불과 반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압축 달성한 경이로운 역사를 후대에 물려주었다. 전쟁과 국토분단, 인권과 자유의 희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피땀 흘려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발전시켜온 제1, 제2세대를 지나 우리는 지금 안일과 분열의 위태로운 벼랑길을 내달리는 제3세대가 아닌가?


우리 국민은 나라의 건국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건국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다. 도리어 건국사를 놓고 두 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중이다.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건국을 애써 부정하려든다. 임시정부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대한민국을 싫어해서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대한민국 초대정부를 친일정권이라고 비난하는 쪽에서는 북한 김일성 정권에 친일경력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에는 입을 굳게 다문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싶은 뒤틀린 역사의식 탓일 게다. 광복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해방군으로 열렬히 환영받았다. 미군을 점령군이라고 비난한 것은 한반도를 점령했던 일본군 패잔병과 북한을 접수한 소련군 대위 김일성의 공산당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어떤 정치인들도….


일제 식민통치 시절, 한반도의 2천만 민중은 주권자인 국민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고, 임시정부는 우리 영토를 실효적으로 지배할 힘이 없었다. 치안을 유지하거나 국민을 보호할 능력도,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권능도 없었다. 임시정부 수립은 이념적, 정신적 건국이었을지언정 국민·국토·주권·정부라는 국가성립 4대요소를 두루 갖춘 건국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 ‘복국(復國)과 건국’을 미래의 과업으로 규정했던 이유다. 그 미래의 과업이 1948년 5.10 총선거와 제헌국회 구성을 거쳐 8.15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으로 마침내 성취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건축물이 들어설 바탕자리를 터 닦고 그 주춧돌을 놓는 기초과정이었으며, 건축물이 완공된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이었음이 부인할 수 없는 건국사의 흐름이다.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은 갈등관계에 있지 않다. 임시정부는 건국의 혼(魂), 대한민국은 건국의 몸통이다. 치열한 이념투쟁을 거쳐 어렵사리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 제1세대는 우리 국민을 자유민주공화의 나라로 이끌었고, 제2세대는 빈곤과 억압의 굴레를 걷어내 자유로운 경제대국으로 성장시켰다. 오늘의 제3세대는 앞 세대의 피와 땀과 눈물을 기억하고 있는가? 자녀들에게 건국의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두렵건대, 이븐 할둔이 경고한 제3세대의 망국행로를 치달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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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니스트: 변호사로 현재 숙명여대 석좌교수로 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중앙법원장 등 법관으로 근무하던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문학, 철학 등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는 PEN International, Korea 회원으로서 인권위원장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서 문인권익옹호위원장을,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를, Seoul National Symphony Orchestra에서 명예지휘자를, FEBC(극동방송)에서 신앙 칼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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