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4월은 잔인한 달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시인 엘리엇은 <황무지>의 첫 구절을 이렇게 읊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죽은 땅에서 꽃나무를 키워내야 하는 4월은 잔인한 계절이다. 그러나 그 잔인한 4월이 새 생명을 움트게 한다. 생명은 산고(産苦)의 아픔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기에….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역사에 깊이 새긴 링컨 대통령은 1865년 4월 15일 과격한 흑백분리주의자의 총격으로 살해됐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암살사건이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옛 흑인 노예의 아들들이 옛 백인 주인의 아들들과 함께 형제처럼 손을 잡는 꿈,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꿈이….” 1963년 8월 워싱턴 행진에서 감동적인 ‘평화의 꿈’을 펼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8년 4월 4일 한 백인우월주의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극단적 인종차별이 평화의 꿈을 짓이긴 4월의 비극이었다.
3·1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향남면 제암리에서 일본 군경이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두고 불을 질러 교인과 주민 29명이 총칼과 화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제암리의 4월은 지금도 그날의 비극을 잊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탄생을 눈앞에 둔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남로당의 인민유격대와 미군정 휘하의 토벌대 사이에 무력충돌이 벌어져 2만 명이 넘게 희생됐다. 제주 4월의 저 아픔은 좌우갈등의 깊은 뿌리가 되어 우리 역사 속에서 지금껏 꿈틀대는 중이다.
2014년 4월 16일 수학여행 길의 학생들을 태우고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해운사의 가증할 탐욕, 선원들의 어이없는 업무태만, 정부와 해경의 엉성한 구조작업 탓에 승객 300여 명이 사망·실종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20대 신참 3등항해사에게 조타실을 맡기고 침실에 누워있던 대리 선장은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을 내보낸 뒤 전용통로로 몰래 배를 빠져나와 구조선에 올랐다. 그렇게 살아나온 선장이 한가롭게 젖은 지폐나 말리고 앉아 있을 때, 스물두 살의 임시승무원 박지영 씨는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대피시키느라 동분서주하다가 침몰하는 배와 함께 바닷속에 잠겼다.
“언니는 왜 구명조끼 안 입어요?” 학생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승무원은 마지막이야.” 선장도 항해사도 모두 헌신짝처럼 내던진 책임윤리‧직업윤리‧생명윤리가 아르바이트 여대생의 입에서 울려 나왔다. 생명이 다하기까지 제자리를 지킨 그녀의 빈소에는 ‘대한민국 국민’의 이름으로 바쳐진 조화가 놓였다. 세월호 참사 관련자들은 엄중한 역사의 심판을 받았지만, 박지영 승무원은 우리 국민의 가슴에 사랑과 희생의 꽃봉오리로 부활했다. 아니, 지금도 꺼지지 않는 4월의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아, 4월은 이토록 잔인한 달이지만, 고통의 흙더미를 뚫고 새싹이 솟아오르는 4월은 또한 생명의 달, 부활의 계절이기도 하다. 골고다 언덕의 승리자 빌라도는 2천여 년 동안 사도신경에서 악(惡)의 대명사처럼 암송되어왔고, 패배자였던 십자가의 사형수 예수는 부활의 선(善)한 승리자로 찬양받고 있다.
4․10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이나 낙선한 후보들에게 4월은 잔인한 달일 것이다. 그렇지만 선거의 승패가 이후의 정치적 승패로까지 줄곧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다. 승자가 패자로, 패자가 승자로 뒤집히곤 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링컨과 마틴 루터 킹의 생명을 앗아간 암살자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죽었고, 그 흉탄에 스러진 넋들은 역사 속에서 자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인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평화의 꿈, 죽음 앞에서도 제 자리를 지킨 사랑의 희생… 이 다짐과 꿈과 사랑을 저버리면 선거의 승자도 패자도 모두 영원한 패배자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게 될 것이다. 자유의 다짐, 평화의 꿈, 사랑의 희생이 잔인한 4월을 생명의 봄으로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