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기록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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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기록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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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던 사진작가 구본창의 작품전 ‘항해, Voyger’가 막을 내렸습니다. 3개월 동안

11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지난 1월, 관람객의 한 사람으로 전시회를 찾았던 필자도

새삼 기억에 남는 전시회였습니다. 특히, 구본창 아카이브(Archive: 자작품이나,소장품,자료등을 디지털화 하여 기록, 분류하는 일) 전시공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날, 유난히 아카이브 룸 안에 길게 늘어선 관람객 들로 인해 입추의 여지가 없었거든요. 한참을 늘어서서 기다린 후에야 사람들 틈을 비집고 겨우 그의 작품들 앞에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었습니다. 


‘달 항아리’ 사진으로만 알고 있던 그의 이번 회고전에서 초창기인 1980년대 독일 유학시절부터 귀국 후 지금까지 그의 작품 편력이 사방 벽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카이브를 연대별 특징으로 살펴봅니다. 1) 사진 위에 실과 천을 재봉틀로 꿰매고 이어 붙여 인화지를 확대한다. 2) 필름을 긁어내 동판화처럼 만든다. 3) 인화된 사진을 불에 그을리기도. 4)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과 영화포스터 제작. 5) 한국전통의 문화, 문화재를 모티브로 삼는 등의 변천과정을 보게 됩니다. 


구본창 작가는 사진이란 장르를 ‘객관적 기록에서 주관적 예술로 변환시킨 결정적 계기’ 를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았지요. 소년시절 일찍부터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는 사라질 만한 사물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지속했다고 말합니다. 닳아 없어질 만한 비누, 벽 모서리에 남아있는 먼지,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백자항아리까지 사진으로 기록했다는군요. 그러한 사물들이 그의 작품 기록을 통해 영원히 살게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고 털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표현과 방식이 달랐을 뿐, 비슷한 생각의 궤적을 지녔던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도 나와 있네요. 기록형 작가 중 빼 놓을 수 없는 작가를 들자면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1920년 초 서울에서는 한국 미술사상 작지만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서양의 여성화가가 한국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 전시회가 열린 것입니다. 지금이야 그림 전시회가 낯선 것이 아니지만, 당시는 화가가 자기 그림들을 모아 전시를 갖는 것 자체가 화젯거리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도 전시회를 연 주인공이 한국인이 아닌 서양인,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지요. 주인공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30대 초반의 영국 여성이었습니다.


1920~40년 한국을 여행하면서 그린 한국 풍속화 70여 작품들이 작가 자신의 해설과 동생 엘스펫 로버트슨 스콧과의 공동 집필로 되어있는 책입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필치로 그려낸 그녀의 작품들이 당시의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 풍경들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Old Korea. 엘리자베스 키스, 엘스펫 로버트슨 스콧 지음, 송영달 번역, 2006). 그 중 하나인 기록형 인간 담뱃대 문 노인, Lazy man

Smoking’ 을 소개 해 볼까요. 흑백 목판화로 된 그림인데 갓 쓴 노인이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 가끔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한가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담뱃대는 아주 길어서 양반은 하인이 불을 붙여 주어야 비로서 피울 수가 있다. 하기야 그 길이로 볼 때 본인이 하려고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말 행복한 흡연가는 근사한 담뱃대를 뻐끔대고, 꿈꾸 듯이 먼 곳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앉아 있는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내가 만난 한국사람들’ 중 177쪽, 송영달 번역).


그녀는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 서울 첫 방문 후, 20여 년 역사의 격랑기를 손수 체험하면서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그림들을 그려냈습니다. 그녀 역시 지속 반복적인 스케치와 목판화, 에칭 등 연대별로 제작, 기록해 놓은 결과, 지금도 그녀의 화집과 글을 통하여 당시의 한국 땅의 사람들과 풍경을 만나볼 수 있게 된 거지요. 무릇, 두 작가뿐만이 아닐 겁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생각은 기록이 되고 기록은 인생이 된다. 한 번쯤 최선을 다해 성장하고 싶다면, 성공과 성취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지금 당장 기록하라’ 는 기록 전문가의 조언이 새삼 와 닿는 듯 싶습니다.(김익한著, 거인의 노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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