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한겨울은 종(鐘)의 계절이었다. 세밑에는 구세군 자선냄비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성당과 교회당의 종탑에서 성탄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새해도 제야(除夜)의 종소리와 함께 열렸다. 세상의 모든 종이 한꺼번에 울려대는 한겨울은 종소리로 가득했다. 겨울만이 아니다. 봄도 종소리와 함께 찾아온다. 희망의 종, 평화의 종, 자유의 종…, 우리 마음을 울리는 봄의 종소리다. 봄의 종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새벽 종소리는 잠든 영혼을 일깨우고, 저녁 종소리는 분주했던 일상을 고요한 명상으로 이끈다. 

종의 속은 텅 비어있다. 속이 꽉 차 있으면 맑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무릇 지극한 진리는 형상을 초월한 것을 포함하기에 이를 보아도 그 근원은 볼 수 없으며, 진리의 소리는 하늘과 땅을 진동하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성덕대왕 신종(神鍾)에 새겨진 에밀레종의 종명(鍾銘)이다. 청룡의 해에 울리는 봄의 종소리가 대지의 밑바닥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솟구쳐 오른다. 

종소리는 순수하고 경건하다. 심지어 조종(弔鐘)마저도 삶과 죽음에 대한 엄숙한 성찰을 품고 있다. 성공회 신부 존 던은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이 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는다. “세상의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닐지니/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대양의 한 부분일 뿐/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하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기에.” 소리를 울리기 위해 종은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맞아야 한다. 세상을 깨우기 위해 종은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이문재 ‘농담’ 중) 아프게 맞을수록 종소리는 더 멀리 울려 퍼진다. 사랑 없이는 낼 수 없는 종소리…, 희생의 신음, 헌신의 울음이다. 

제 속을 다 비우고 온몸을 매질에 내어주는 종의 울림은 우리 곁 그늘진 곳에 웅크린 민초(民草)들의 울음소리와 퍽 닮았다. 가난한 사람 더 가난해지고 외로운 사람 더 외로워지는 각박한 세태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서럽게 울고 있는가. 돈과 권력을 거머쥔 알량한 손들의 갑질이 쓰라린 서민의 가슴을 얼마나 아프게 헤집고 있는가. 상생의 끈이 점점 느슨해지고 모듬살이가 더욱 각박해진 시절…, 여기저기서 큰 목소리로 정의와 복지를 외치지만, 세상은 늘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다. 저마다 외치는 정의가 다르고, 부르짖는 평등도 딴판이다. 우리의 힘으로 세상의 고통을 다 없애려 했지만, 부질없음에 아픔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이제는 차라리 우리의 우둔함으로 세상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야겠다.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기를 바라야겠다. 찢기고 상처 입은 가슴들 곁에 다가가 속절없이 눈물 흘리는 가난한 마음을 위로해야겠다. 종처럼 울고 있는 이들 어깨에 우리의 어깨를 서로 잇대어 고통의 무게를 함께 줄여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서로 나누고 보살펴도 다 품을 수 없는 고통의 짐을 고단한 두 어깨에 짊어진 이들에게 소망의 종이 울리기를, 견디기 힘든 삶의 중력으로 굽을 대로 굽은 등줄기에도 위안의 종소리가 고요히 내려앉기를 기원한다. 

한겨울의 종이 아쉬움과 회한의 저녁종이라면, 새봄의 종은 희망과 소원의 새벽종일리라. 종마다 소리가 다르지만, 모든 종소리는 함께 울려도 결코 불협화(不協和)로 치닫지 않는다. 부동(不同)의 다양성 안에서 화(和)의 통일성을 이룬다. 그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울림이 온 누리에 두루 퍼지는 봄의 종소리를 고대한다. 

“종은/ 누군가 울리기 전에는/ 아직 종이 아니다.”(오스카 해머슈타인) 아무리 훌륭한 종이라도 성실한 타종수 없이는 감동의 소리를 울리지 못한다. 범죄혐의로 재판받는 정치인, 친북 활동가, 전과자 그리고 저들의 변호인까지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서 분열을 선동하며 갈등을 부추기는 선거철이다. 그렇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황금빛 선거공약보다 속 깊이 따뜻한 동행의 손길이 더 아쉽지 않은가. 헌신과 희생의 신음을 토해내는 그 타종수의 손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