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했던 삶…성도의 수고와 눈물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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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했던 삶…성도의 수고와 눈물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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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선교침례교회 김영하 목사는 “성도들과함께 하는 오늘의 목회현장에 늘 감사하다”고 밝혔다.

 


 

믿음의 일꾼과 건강한 사역자를 찾아서 / 9. 샬롬선교침례교회 김영하 목사


성령체험한 중학생때 ‘목회자 서원’

개척교회 시절 배달·집수리 등 경험

"이민자들의 마음 이해하는 계기로" 

“화려한 목회 아닌 현재에 감사” 



힘차고 건강한 샬롬선교침례교회 김영하 목사는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청주에서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울로 이사했다. 1960년 대말, 서울의 달동네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육두문자가 난무했다. 달동네 상황을 본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교회에 가라고 권유했다. 어머니 말씀에 순종한 소년 김영하는 동네에 있던 서울중앙침례교회(오관석 목사)에 출석하게 되었다.


당시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던 오관석 목사의 서울중앙침례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왕성했다. 소년 김영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령체험을 했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부흥회에서 참석해서 목사가 되기로 서원했다. 당시 장로교의 대표적인 부흥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신현균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며 뜨거운 기도를 마치고 ‘목사가 될 사람은 일어서라’고 했는데 그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도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다. 교회에서는 착실한 학생이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릴 때면 영락없이 그 또래 사춘기 소년이었다. 그동안 받은 은혜, 헌신도 잊고 살았다. 그런데 덜컥 폐결핵이 걸렸다. 병실로 찾아온 친구가 “너 목사 된다고 했잖아, 너 서원했잖아”하고 돌아갔다. 친구가 떠난 병실에서 소년 김영하는 기도했고, 기도원 침상에서 문제를 풀고 신학교에 진학했다.



김 목사는 군대에서 사역 실습을 했다. 신학대학에 재학 중에 입대해서 강원도에 있는 포병대대에 배치를 받았다. 전입 신고를 막 마쳤는데 부대 인근 민간교회 담임 목사가 갑자기 떠나자 설교를 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대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고 부대 신앙활동과 군종 활동을 통해 열심히 사역했다. 김 목사는 군대 생활을 통해서 사역 실습을 했다.



김 목사는 신학수업을 마치고 바로 교회를 개척했다. 서울 변두리 망우동에 지하실을 교회로 꾸미고 목회했다.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 직원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야학과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동네 아이들에게는 방과후학교 같은 활동을 했고 이주 노동자들을 돕는 일도 했다. 소외 계층들을 섬기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행복한 날들이다.



우연치 않은 기회로 미국에 왔다. 김 목사는 일하며 교회를 개척했다. 배달도 하고, 청소도 하고, 집 수리 그리고 페인트칠도 하며 자신처럼 고단한 삶을 사는 성도들을 섬기는 목회를 한다. 교회 개척은 지난(至難)한 과정이었지만 이를 통해 김 목사는 목회에 눈을 떴다. 성도들의 수고와 눈물을 아는 목회자가 되었고 그들이 드린 헌금의 의미를 아는 목회자가 되었다.


김 목사는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목회자다. 그는 말로만 목회하지 않는다. 삶으로 실천하며 성도들을 양육한다. 김 목사는 성도들과 더불어 섬기며 목회한다. 정착 과정에서 김 목사가 경험한 다양한 직업도 섬김과 실천 목회에큰 힘이 된다. 웬만한 시설 관리나 수리 공사는 김 목사가 직접 할 수 있다. 교회의 헛된 지출을 막고 성도들과 더불어 교회를 섬기며 누리는 행복이 크다.

 


김 목사는 크고 화려한 목회를 갈망하지 않는다. 오늘주어진 목회현장에 감사하며 자족한다. 두 번의 개척 경험과 미국 정착을 통해 얻은 야성이요 호락호락하지않은 현실에 대한 자각이다. 1%에 속하는 대형교회 목회나 스타급 목회를 꿈꾸지 않고 오늘의 목회현장에감사한다. 현실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목회하는 그는 행복한 목회자다. 

강훈 종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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