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는 상관에게,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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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는 상관에게,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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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향우회중앙회 이진삼 총재


“사람은 정도를 걷고 

경우에 틀리면 안 된다”


이진삼 충청향우회중앙회 총재(88)는 군인, 체육부장관, 국회의원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에 기여한 인물이다.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그는 어쩌면 생의 마지막 봉사를 1250만 충청인과 충청 출향인, 재외동포 충청인들을 위해 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었고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 놓을 각오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 “역시 이진삼이다”

1937년 2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사람은 정도를 걷고 경우에 틀리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 속에 성장한 그는 원래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중학교 2학년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북한군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1955년 6월 육사 15기로 입학하여 1959년 소위로 임관했다.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의 신념을 가진 군인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베트남전에서 무공훈장을 받았고 19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 때 김신조를 설득 자수시키는 등 공비섬멸에 앞장섰다. 간첩작전의 달인이면서 1989년 ‘제4 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군 생활 중 그가 받은 화랑무공훈장만 3개이며 국군정보사령관,

육군참모총장(대장)을 역임한 후 전역하였다. 


군 생활 때 미군들로 얻은 별명은 ‘타이거 제너럴(Tiger General)’ 이며 조선일보 덕분에 아주 흥미로운 별명도 얻게 되었는데 바로 ‘귀털 장군’이다. 그의 외모 중 소위시절부터 특이하게 귀에 털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이걸 조선일보가 ‘캐리커처’화 하여 생긴 별명이다. 흔하지 않은 외모인데 정작 본인은 ‘장수털’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의 호는 ‘우당(吁堂)으로 해 돋을 ‘우’자에 집 ‘당’자이다. 광산업을 하던 부친이 그가 태어났을 때 집을 둘러싸고 해가 환하게 비췄다는 일화를 듣고 만든 것이다. 군 생활시절 그는 바른 말을 잘하는 장교로 소문이 자자했다. 바른 말을 하려면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 하에 보병 병과이면서 포병, 기갑, 통신 병과를 따로 공부할 정도였다. 따라서 교관시절 장교들이 그 앞에서 이론적으로도 꼼짝 못했을 정도로 그는 타고난 군인이었고 이를 줄곧 지켜 본 노태우 대통령이 “역시 이진삼이다”라면서 참모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병 생활 개선에도 앞장 섰고 복지에도 힘 썼으며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다.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을 거치면서 바른 말과 직언을 숱하게 했지만 그의 강직한 군인정신에 감격하여 오히려 진급이 남들 보다 빨랐다. 주한미군들과의 관계도 원만해서 팀스피릿 훈련 같은 굵직굵직한 한미간 합동훈련 후 우정의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다. 전역 후 올바로 역사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극동문제 전문가’가 된 것도 정도를 걷자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건국전쟁과 이진삼

요사이 흥행을 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고 한다. 그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기억들은 날짜까지 기억할 만큼 또렷했다. 특히 육사 임관식 때 이승만 대통령의 “군대를 키우는 것은 국가가 어려울 때 보호하는 기반을 닦는 것뿐만 아니라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라는 연설이 인상 깊어 아직도 생각난다고 했다. 


초임장교 시절이었던 4.19 당시, 직감으로 부정선거라는 것을 알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는데 휴가를 보내 현장에서 배제하려고 했단다. 군 생활을 그만둘 각오를 하면서까지 이를 바로 잡아보려 했는데 징계를 받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선생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단독후보가 되었기 때문에 부정이 일어날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부통령 선거에 있어서 유력 후보였던 장면 선생을 낙선시키고 이에 여당인 자유당이 이기붕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촉발된 부정선거가 일어났고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 폭로함으로써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것은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이 사태파악을 하게 되었다는 것과 비록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이 있었지만 ‘언론의 자유’만큼은 확실히 보장했던 것이다. 이 총재는 민주주의의 으뜸을 ‘언론자유’에서 찾았다. 또한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하자 “부정을 보고 이야기 하지 않는 국민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하면서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을 방문 위로하고 4월 26일 평화적인 하야를 한 사례를 들어 그가 과연 좌파들이 씌운 ‘독재자’ 프레임에 걸 맞는 인물인지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만약 독재자였다면 그의 장례식이 그토록 온 국민의 슬픔과 비통함 속에 엄숙하게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그는 뼛속부터 충청인이다. 충청향우회중앙회뿐만 아니라 (재)충청장학문화재단 총재를 겸하고 있다. 사실 그는 인터뷰 서두에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나 자신을 소개하기 참 애매할 때가 많아요. 어떤 분들은 장관님이라고 부르고 어떤 분들은 의원님, 또 어떤 분들은 장군님이라고 했다가 요사이는 총재라고도

부르니 명함도 좀 복잡해지고 말이죠….” 대뜸 기자가 어떤 호칭이 가장 많이 불리워지는 지와 어떻게

불려지기를 원하시는지를 물으니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을 ‘장관’으로 부르는데 정작 자신은 현재 직함인

‘총재’로 불리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전역 이후에도 다방면에서 활약을 펼쳤지만 아무래도 애착이 가는 것은 ‘충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위해 일하는 것이란다. 충청인 인재를 키우는 일에 올인 하고 있다.


이 총재의 좌우명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인간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 총재 역시 평생을 한 번 목표를 세우면 이를 이루기 위해 절박하게 노력을 해왔다고

했다. 노력의 크기가 클수록 운도 좋았고 하늘도 도왔다고 했다. 충청인들이 때로 ‘홀대론’까지 주장하지만 부단히 갈고 닦을 때 반드시 기회와 미래가 열릴 것으로 믿고 있다. 


충청인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실제 마음인 내심(內心)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마음만큼은 최고라고 했다. 때문에 재외동포 충청인들 역시 애향심으로 향토 인재 돕기에 나서라는 뜻에서 ‘선임장’ 수여를 통해 자부심과 긍지를 더하기를 바랬고 이번 도미(渡美)의 목적이라고 했다.


#에필로그

이진삼 총재와 조선일보는 관계가 깊다. 앞서 이야기 했던 ‘귀털 장군’ 캐리커처를 비롯해 자신의 기사가

가장 많이 실린 신문이 ‘조선일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물론 월간조선, 주간조선의 독자이기도 하고

인터뷰도 많이 진행했는데 특별히 자신이 설득해 자수시킨 김신조와의 조우는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김신조가 이진삼을 무섭다고 했습니다. 왜 무서우냐고 하니까, 얼굴도 조그맣고 요만한데 눈에서 빛이

났다고 해요. 방탄조끼도 안 입고 나와 토벌작전할 때 자기 수갑을 풀어줘서 살았다고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가 왜 ‘호랑이 장군’이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특별히 체육청소년부장관 시절을

이야기 할 때는 바로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기억했다. 


그의 장관 재직 시 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64개국 중 10위를 했고 제25회 바르셀로나 세계올림픽대회에서 169개국 중 7위를 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월계관을 쓴 일은 지금까지도 보람된 일이라고 했다. 


다만 가족이야기가 나오자 무척 미안해했다. 평생을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살다 보니 아들 하나 딸 둘을 두고 있지만 한 번도 따듯하게 안아준 적이 없다고 했다. 당시 분위기가 사병들은 휴가가 있어도

장교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보니 아들의 출산을 나중에서야 알 정도였다고. 늦은 후회이지만

‘증손자’까지 생긴 요즈음 가족들과 스킨십을 강화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다고. 


평생을 국가와 민족, 그리고 충청을 위한 삶을 살아 온 이 진삼 총재. “명예는 상관에게,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라는 그의 군 수칙을 상기하면서 부하들을 위해 그랬듯 이제는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 주요 약력

1937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육군사관학교 15기

서울대학교·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9공수특전여단장

육군참모총장

체육청소년부 장관

제18대 국회의원(자유선진당)

(현) 충청향우회중앙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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