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무관의 제왕' 뽀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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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37-1> '무관의 제왕' 뽀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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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 이상용(왼쪽)과 엄영수. /엄영수 제공

방송 55년 남은 건 장수프로 10개뿐 


#. 짧지만 길게 웃기는 뽀빠이 원수를 갚다

신언서판(身言書判) 용모 화술 학문 판단력 네 가지를 고루 잘 갖추었다면 인재로 등용할 만하다는 한비자의 인물 선택론이다. 본인의 논리대로 그는 초라한 모습, 더듬는 말투, 서투른 판단력 때문에 글재주가 당대 최고 실력자였으나 옥중에서 운명할 줄이야!


사자성어라기 보다 코미디쇼다. 짧지만 너무 웃긴다. 뽀빠이 선배는 단신이지만 길게 웃긴다. 사람을 평가할 때 신, 언, 서, 판 차례대로 보고 결정하기 때문에 우선 키 크고 잘 생겨야 한다. 군에 입대해서 배치받을 때도 개그맨 응시했을 때도 대학에서 미팅할 때도 이것은 변함없는 진리였다.


업무가 아닌 일상으로는 개그맨 생활 45년 만에 처음으로 뽀빠이 이상용 선배를 만났다. “영수야, 축하해다오. 나 원수를 갚았다. 벼르고 별렸는데 한방에 보내버렸다! 선배의 높은 인기만큼 고난의 세월이 길었다. 부침의 사연을 알기 때문에 뭘까 긴장했다.


“우리 아들이 사업차 홍콩에 나가서 사는데 외대 중국어학과 나온 며느리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 맞벌이 부부인데 손주가 하나 있어. 키가 190cm나 된다. 그동안 나한테 키가 어쩌고 저쩌고 하던 인간들 싹 청소했다. 고종의 키가 156cm, 나폴레옹 158cm, 등소평 158cm 등 세계적인 인물들은 다 키가 작았다. 나 뽀빠이 160cm, 그들을 앞찌르는 표준이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겸용이다.” 상당히 많은 준비를 했다. 하지만 한 번 정해진 키는 변하지 않는다. 


주택가 중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건강을 위해 소식을 하고 어릴 때부터 자장면을 최고의 음식으로 알고 살았지. 여기 자장면 하나! 넌 뭘 할래?” 강남에 있는 고급 요리집이고 손님도 많았다. 복잡하고 붐비는 바쁜 시간에 자장면 하나 시키면 너무 가난하게 보일까, 스케일이 작은 취급 당할까, 종업원에게 무시 당할까, 밉보일 거 같은 고정관념 때문에 주인이 눈치가 보였다. 요리 한두 개 시켜서 드시고 식사하시지요. 야, 그걸 누가 다먹어. 네 맘은 내가 잘 알아. 내 단골이야 원 플러스 원, 자장면 둘, 충성! 뽀빠이 이상용 주문 보고 끝. 자장을 만든다. 실시! 복창 실시!” 종업원이 크게 웃었다.


뽀빠이 선배의 웃음 한 방에 복잡한 생각이 총정리 됐다. 식사를 안해도 배부르다. 하나 배웠다. 충성, 잘 먹겠습니다.


#. 마누라에게 맛집 500곳 선물

빌라에 나하고 마누라 단둘이서 32년째 살아. 너무 쓸쓸해 평생 혼자 활동했지. 스탠딩 개그, MC전문이었으니까 코미디언실, 코미디협회 어떤 단체나 조직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어. 가끔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구봉서 선생님, 허참을 방송국 안에서 만나긴 했어도 대화를 길게 나누지 못했어. 그냥 스치고 지나칠 뿐 수 많은 전방부대 위문공연 요청을 단 한 번도 거절한 적 없이 응하다 보니까 내 생활은 무너지고 나 자체가 사라졌드라구. 50년을 매일같이 아침 일찍 나갔다가 새벽 1시에 들어왔어.


연예인 한다고 가족들한테 너무 야박했지 제일 미안한 건 마누라와 가족이야. 이제부터라도 잘 할려구해. 80살 넘어 어깨쳐저 갖고 집에 들어와 대우받으려 하면 누가 받아주겠어. 전국에 맛집 500곳을 마누라를 모시고 다니면서 맛있는 음식 먹고 경치 좋은 관광지 구경 실컷하고, 나무 밑에서 휴식 취하면서 대한민국을 한 바퀴 돌 계획이야!


은퇴한 건 아니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려고 해. 돌아보니 그래도 잘 산 것도 있어 빚 없고 대출 없고, 주식은 착실하게 모았지. 쌀 보리 밀 콩 팥 조 옥수수…. 아재개그가 아직도 쌩쌩하게 살아있다. 


내일 고향 서천에 좀 다녀 올려고 해. 재래식 시장에 큰 불이 나서 상가점포 260개가 다 탔어. 성금 좀 낼려고 해 다음 날 천만원을 기부했다.


나 사는 빌라는 22평이지만 건강은 80평이고, 행복은 150평이야. 언제적 뽀빠이인가 영원불멸의 뽀빠이다. 단 하나뿐인 후배 관객을 놓고 어떻게 해서든지 웃음을 이끌어 내려고 조크를 던진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고 무대에 올라가면 신선하고 빵빵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개그의 창시자, 개그의 개척자, 원조 개그맨 뽀빠이 이상용 아직도 살아있다. 최초의 개그맨 100세 돌파로 또 다른 신기록을 세울 것이다.


#. 엇갈린 우정, 김신조는 청와대로 뽀빠이는 전선으로

대학의 ROTC(학군장교 후보생) 초창기 시절엔 ROTC를 사회경력으로 인정했다. 평생 장교로 예우하고 취업시험에도 가산점을 줬다. 국가 엘리트로 우대했으니, 당연히 경쟁률이 높았고 인기도 좋았다.

그러나 대학생활의 낭만과 자유가 없었고 상급자에 의한 집합과 체벌, 간섭이 심해 ‘바보티씨’ 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뽀빠이가 ROTC 출신이라 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신체검사는 어떻게 통과했을까? 의문을 갖는다. 탱크부대 소대장이었다고 하면 거의 실신상태가 된다. 


연예예술인협회 연기분과 김소웅 위원장(당시 무대MC 하사)의 회고. "인솔장교 뽀빠이 소위가 캄보밴드 6인조를 인솔하여 1군단 사령부 군예대에 와서 3개월간 공연 활동했다. 사병들과 자주 어울렸고, 무척 웃겼다. 그때부터 방송에서 웃길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이례적으로 장교가 직접 무대에 섰는데, 66년 고대 Mr. 보디빌더 출신으로 몸매가 특출했다. 육체미 쇼를 보여 주었다. 연기를 잘했고 병사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같은 군인이었기에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공연 후 해체되어 자대로 복귀했다. 차인태 아나운서 실장, 탤런트 주현이 ROTC 5기 동기다."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31명이 서울에 침입했다. 비상이 걸렸다. 모든 화력이 38선에 집결했다. 뽀빠이 소위는 남방한계선 산꼭대기를 향해 탱크를 몰고 돌진했으며 김신조는 청와대 담벽까지 왔다가 귀순하여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1.21사태 때는 엇갈렸던 남과 북의 둘은 친구가 되고 자주 만났다. 나와는 계급장을 떼고 친구로 55년 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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