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지금 우리 사회는 양극화와 불평등에서 솟아나는 분노가 거칠게 꿈틀대고 있다. 국민의 혈세를 찰거머리처럼 빨아먹으며 특권 내려놓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정치꾼들, 너무 많이 가진 기득권층의 탐욕스러운 횡포에 서민들의 울분이 불길처럼 치솟는다. 노령화 시대의 짐을 떠안게 될 청년들의 좌절과 분노가 불안하게 자라는 중이다. 공의(公義)의 물은 메말랐고, 정의의 강은 고갈됐다.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구호가 터져 나올 만큼 정의의 횃불을 치켜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분노의 횃불로는 정의를 올바로 세우지 못한다. 역사상 어떤 혁명의 불길이 참다운 정의시대를 구현했던가. 옛 기득권층을 새로운 특권층으로 교체하는 권력 이동만 있었을 뿐… 새로 등장한 권력 또한 위선과 탐욕의 무리로 타락해간 것이 뭇 혁명의 초라한 뒤태였다. 무려 47개 죄목으로 구속·기소되었던 전 대법원장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고, 사법개혁을 외치며 그를 검찰의 손에 넘겨준 후임 대법원장은 직권남용과 허위공문서작성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무엇이 사법개혁이라는 것인가. 

여름 내내 건조한 이스라엘은 가을에 되어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메말랐던 대지가 살아나고 들판의 곡식, 동산의 풀과 나무에 싱그러운 생기가 돋아난다. “공법(公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河水) 같이 흐르게 하라.”(아모스 5) 성서는 정의를 이글거리며 치솟는 불길이 아니라 나지막이 흐르는 물길에 비유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리흐르는 물은 바위에 부딪히면 돌아가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곤두박질치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쉼 없이, 고요히 흘러내릴 뿐이다. 

아래로 나지막이 내리흐르는 물길은 생명의 젖줄이요, 위로 높이 치솟는 불길은 죽음을 부르는 뱀의 혀 놀림이나 다름없다. “혀는 불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야고보서 3) 깊은 숲속 옹달샘 물은 더할 수 없이 맑고 시원하지만, 언젠가는 개울이 되고 강물이 되어 바다로 흘러들어야 한다. 아래로 흐르지 못하는 물은 결국 썩은 구정물이 될 수밖에 없다. 

세속의 정의는 불길처럼 타오르는 분노의 열정으로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보다 높고 신성한 공의는 물길처럼 낮고 고요한 사랑의 에너지로 이뤄간다. 그 사랑의 에너지는 상승(上昇)하는 불길이 아니라 하강(下降)하는 물길이다. 높고 높은 하늘의 영(靈)이 낮고 낮은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내려왔다는 ‘신비로운 하강’의 믿음이야말로 지극한 사랑에 대한 염원일 것이다. 

하강하는 겸손은 정의의 본질적 속성이다. 오만한 정의는 위장된 정의요 불의(不義)의 가면일 뿐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 분노와 증오의 칼을 휘두르는 권력의 손길은 하강하는 물길과는 정반대로 불길처럼 위로만 높이 치솟으며 상승한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정의의 강물은 마침내 사랑의 바다로 흘러든다. 대해불기청탁(大海不棄淸濁)… 바다는 깨끗한 물, 더러운 물을 가리지 않는다. 흐린 물, 지저분한 물을 다 받아들여 넉넉히 정화(淨化)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 정의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정의롭게 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정의는 위로 치솟는 불길처럼 남에게 큰 소리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길처럼 우리 스스로가 묵묵히 세워가야 한다는 뜻이리라. 정의의 행로는 분노의 에너지로 높이 치솟는 상승의 불길이 아니다. 사랑의 열정으로 내리흐르는 하강의 물길, 낮은 자리를 찾아 나지막이 내리흐르며 뭇 생명을 살려내는 사랑의 물길이다. 

유대의 옛 현인(賢人)은 물의 흐름을 '생명 살림'으로 묘사했다. “하늘에서 내린 비와 눈은 땅을 적시고 싹을 틔워 열매를 맺게 하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거리를 준 뒤에야 근원으로 다시 돌아간다.”(이사야 55) 겸손히 하강하는 정의의 물길이 드디어 도달하는 자리는 다름 아닌 사랑의 바다… 선지자 아모스의 호소에 다시 귀 기울인다.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 사랑의 바다를 향해 아래로 아래로,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가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