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매력적인 직업 ‘항공승무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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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매력적인 직업 ‘항공승무원’의 기원

웹마스터

이보영

민주평통 통일전략 전문위원 



‘항공사’ 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훤칠한 키, 세련된 용모(容貌), 깔끔한 유니폼을 입고 환하게 미소짓는 매력적인 모습의 ‘항공승무원’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직업의 선호도 또한 대단히 높다. 승무원 모집 경쟁율이 보통 수 십에서 수 백대 일까지 높은 것은 이 직업의 선호도를 증명하고 있다.


‘승무원'(Flight Attendant)은 비행 시작 전부터 착륙하는 순간까지 탑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일을 한다. 출발 직전 승객들의 자리가 정돈되고 안전벨트를 확인한 후, 산소마스크와 구명복 착용방법, 비상구, 화장실의 위치 등 안전관련 시범(Safety Demonstration)을 보여주면서, 두려움을 완화시키고 기내질서를 유지하며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최근 항공사들은 SD를 영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세계 최초의 객실승무원(Cabin Attendant)은 1912년 독일의 남성 하인리히 쿠비스(Heinrich Kubis)였다. 호텔 경력을 가진 그는 비행선 ‘체펠린'(Zeppelin)으로 상업운항을 시작한 독일 ‘데라그'(DELAG) 항공사에서

1912년 3월부터 객실승무원으로 근무했다. 이후 1928년 독일의 국영항공사 루프트한자(Lufthansa)가 베를린–파리 구간에 남자 승무원(Steward)을 채용하여 본격적으로 객실 서비스를 제공했다.


1920년대 미국의 항공여행은 극소수의 사람만 이용했다. 항공여행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도와 육로 여행자들은 날로 증가했으나 비행기는 텅텅 비어서 항공사 경영이 악화일로에 있었다.

승객을 하늘로 유도하려면 어떻게든 항공여행의 안전성과 신속성을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런 때에 항공여행의 대중적 이미지를 알리고 높이는데 기여한 사람이 바로 엘렌 처치(Ellen Church)였다.


엘렌 처치는 1904년 아이오와(Iowa)주에서 태어 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 자격증을 획득했지만,

간호사보다 비행사에 매력을 느껴 조종사 교육을 받았다. 그후, 엘렌은 보잉항공사(Boeing Air Transport: 현재는 United Airlines)에 지원했지만, 여성은 비행사로서 부적합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엘렌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비행기에 간호사를 객실승무원으로 탑승시키면 어떻겠느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잉항공사에 제안했다. “여성 간호사의 존재가 승객들에게 비행의 불안감을 완화시키고 안정감을 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드디어 1930년 5월 15일 보잉항공사는 엘렌 처치를 세계 최초로 여승무원(Stewardess)으로 채용했다. 엘렌의 첫 비행은 ‘샌프란시스코–샤이엔'(Cheyenne, Wyoming) 구간을 객실승무원으로 탑승했다. 유니폼(Stewardess Uniform)이 없던 시절이라 엘렌은 간호복을 입고, 간호캡(Nurse Cap)을 쓰고 근무했다.


그 후 7명의 간호사가 연이어 승무원으로 채용되었고, 3개월 수습기간 조건에, 월급은 125달러였다. 승객들은 여승무원이 함께 있으니 비행 공포증이 훨씬 감소되고, 비행 멀미를 할 때에도 여승무원이 돌보아

주어 여행이 즐거웠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여승무원(Stewardess)에 대한 승객들의 호응이 대단하자, 항공사들은 여승무원 채용을 본격화 했다.

당시 여승무원 채용조건은; (1) 독신, (2) 25살 이하, (3) 몸무게 115Pound 이하, (4) 키 163cm 이하.

(대부분 소형비행기라서 객실이 좁고 천장이 낮은 관계로 몸무게와 키에 제한을 둠) 또한, 최소한 18개월은 독신이어야 하며, 결혼과 동시에 사직 처리된다는 각서도 받았다.


당시 여승무원들은 객실 내 서비스 외에도 승객의 여행가방(手荷物)을 운반하고, 비행을 마친 후 기내청소를 해야 했고, 좌석의 느슨해진 나사도 조이고, 항공기 급유나 격납고(Hanger)로 이동할 때 조종사와 함께 기체(機體)를 밀기도 했다.


1942년 앨렌은 제2차 대전 중 ‘미국 간호사 부대'(The Army Nurse Corps) 의 간호장교로 자원 입대했다.

그녀는 병상근무와 환자수송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미국정부는 앨렌의 개척정신과 모험적 활동에 대해

‘항공 메달'(Air Medal)을 수여했다.


종전 후 엘렌은 인디애나주립병원에서 주임간호사로 일했으며, 1965년 승마사고로 사망했다. 아이오아주 크레스코(Cresco)시는 엘렌의 업적을 기념하여 공항 이름을 ‘엘렌 처치 필드 공항'(Allen Church

Field Airport)로 명명했다.


조선일보 1937년 7월 13일자엔 ‘일본항공수송회사’의 ‘에어 껄(Air Girl)’ 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무려 70여명의 아릿따운 처녀들이 응모했지만, 단 1명만 채용되었다 한다. 한국 최초의 여승무원이었지만,

일본항공으로 수출된 셈이다. 당시 한국엔 항공회사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22일부터 ‘국영항공사(KNA)’가 임차 도입한 DC-3로 서울-광주, 서울–군산을

운항하면서 여승무원 15명을 선발해 탑승시켰다. 전란 중이어서 항공기 주승객들은 유엔군 및 군사 고문관들이어서 여승무원은 영어에 익숙해야만 했다.


여승무원이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2년 8월 ‘국영 대한항공공사’가 객실승무원 제1기를

모집하면서 부터였다. 제1기로 3명(배경자: 이화여대, 손영민, 김청자: 한국외대)의 여승무원이 채용됐다.

당시 여승무원 공채자격은 20~23세의 미혼에 영어와 제2 외국어에 능통하고, 2년제 대학 이상 수료, 용모

단정하고 160~165cm 의 신장을 가진자로 꽤나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미연방항공국(FAA)는 비행기 좌석 50석당 승무원(Flight Attendant) 1명이 탑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항공승무원은 세계 곳곳을 누비면서 다양한 승객을 맞이하며, 친절과 웃음으로 항공여행을 즐겁게 해 주는 보람을 느끼며, 높은 연봉과 시간적 여유(비행 후)를 누리는 꿈의 직종으로 그 인기(Popularity)는 아직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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