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겨울 제주, 흑돼지 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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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겨울 제주, 흑돼지 삼합

웹마스터

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눈 덮힌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읍내 이웃들로 구성된 산악회원들의 모임에 가입한 후 첫 번째 원정 산행입니다. 2개월 전부터 한라산 출입 허가 QR증명 및 완도출발 제주행 여객선 예약 등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30여 명의 일행이 모든 떠날 채비를 하려는데, 아뿔싸, 출발 하루 전, 기상악화로 여객선 출항이 취소됐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저녁 쯤 기상조건이 다소 완화되어 출항금지가 해제돼, 예정대로 제주행 배에 올랐습니다. 


완도 출항시간은 새벽 2시, 제주 도착 새벽 6시. 도착해 보니 겨울비가 세차게 내립니다. 한라산을 오르는 길은 크게 네 갈래입니다. 어리목이나 영실, 또는 성판악이나 관음사 코스죠. 이번 산행은 성판악을 들머리로 택했습니다. 성판악 입구에 도착하니 기대했던 눈 대신 쏟아지는 겨울비에 우의를 입고 늘어선 등산객들로 북적입니다. 등산로로 사용되는 계곡길은 쌓인 눈과 비가 섞여 녹아 내리면서 장마철 홍수처럼 물이 발목까지 차는 곳이 많았습니다. 그날은 기상관계로 백록담(1950M)은 출입통제, 백록담 밑 능선인 진달래밭(1500M)과 사라오름(1324M)까지만 등반이 허락된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변화무쌍한 제주도는 날씨 때문에 일년 중 맑은 날을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데 딱 들어 맞은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원들은 다소 실망했지만 제주에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산을 오릅니다. 성판악-진달래밭-원점회귀까지 약 7시간 만에 하산 완료했습니다. 난생 처음 겪은 겨울철 우중산행이었습니다. 전세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가는 도중, 차창 밖으로 꽤 오랫동안 영업을 하지 않는 듯한 대형 콘도미니엄들이 눈에 띕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의하면 중국인이 투자한 이 콘도는 코로나 여파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진 이후, 영업 중단된 채 방치되어 있다는 설명입니다. 코로나 발생 이전만 해도 중국인 투자자들이 부동산을 사들이고 곳곳에 건물을 짓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던 제주도였습니다. 당시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던 그 곳도 이제는 한산합니다. 


잠시 후 일행은 성읍 인근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더덕, 고사리, 흑돼지 삼합’이라는 메뉴를 골랐지요. 상차림마다 양은 주전자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습니다. 조(좁쌀)껍데기 막걸리’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성분을 보니 좁쌀, 백미, 소맥분, 효묘 등으로 나와있습니다. 더덕과 고사리, 흑돼지 고기를 섞은 두루치기가 입맛을 돋굽니다. 그 알싸한 막걸리가 산에서 채취한 나물 내음으로 버무린 흑돼지의 미각과 제대로 어울립니다.


오전에 올랐던 한라산 등반길, 수 많은 고사리 군락지가 떠올랐습니다. 제주 음식 전문가의 고사리 예찬론이 있습니다. “고사리는 귀신도 좋아한다는 옛말이 있다. 한국에서는 애어른 할 것 없이 즐겨먹는 나물이다. 그러나 책상다리도 먹는다는 중국에서조차 식용보다 약재로 쓴다. 꽃이 피지 않고 포자번식을 하는

양치식물로 지구 전 대륙에 걸쳐 널리 퍼져 있지만 오로지 우리만 먹는다. 고사리에 독소가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물먹는 도사인 우리의 선조들이 대를 물려 전해오는 귀신 같은 노하우가 있다.봄에 나온 고사리를 먹어야 한다. 자생력이 강한 고사리는 곤충의 공격을 막기위해 스스로 독소를 만든다. 여름철 강한 햇볕을 받고 자란 잎은 독소 또한 강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네 조리법은 놀랍기만 하다. 고사리를 끓는 물에 데쳐 우려낸 후 그늘에 말린다. 데치고 말리는 과정에서 남아있던 독성이 빠져나가며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한, 오히려 뼈에 이롭고 몸을 보하는 음식이 된다. 그 맛 또한 산에 나는 소고기에 견준다. 게다가 해풍에 건조하면 맛이 더욱 풍부해진다.”(양희주, 제주밥상 표류기 35쪽).


다음 날 아침, 제주 시내 식당에서 점심은 다양한 젖갈류와 고등어 구이 정식으로, 저녁은 갓 잡아올린 갈치조림으로 제주 밥상의 풍미를 만끽했습니다. 제주도하면 무질서한 난개발로 경관이 훼손된 지역으로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이틀 간의 토속음식 여행 길에서 ‘제주 다시보기’를 체험했습니다. 제주도의 강점은 자연풍광만이 아니라, 제주 섬사람들의 삶과 음식문화라는 점이었습니다. 늦은 밤, 귀가길 완도항에서 탑승한 여객선 갑판에는 여전히 겨울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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