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 객원기자의 In Hollywood] 음악 프로듀서 겸 작곡가 브랜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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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 객원기자의 In Hollywood] 음악 프로듀서 겸 작곡가 브랜든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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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든 정이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며 포즈를 취했다. 맨 아래는 행복한 '다둥이 가족'. /브랜든 정 제공


“파란만장·좌충우돌 조차 내게는 사치”

마음 터치해 줄 선한 대중음악이 목표



공부보다 음악이 좋았다던 브랜든 정의 대학시절 전공은 ‘영화음악’이다. 그는 명문 버클리음악대학(Berklee College of Music)과 USC 석사과정에서 모두 ‘영화음악’을 전공했다. 보기 드문 전공이다. 10학년 때 목회자인 부모님을 따라 대전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소년에게 이민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약속과는 다르게 목회지는 없었고 부모님은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적응해 나가야만 했다. 


힘든 형편 속에서 그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된 건 바로 ‘음악’이었다. 학교에서의 합창단 활동과 교회에서의 밴드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대까지 갔다. 다만 전공으로 ‘영화음악’을 선택한 건 자신의 본거지가 LA이고 할리우드가 있어서다. 한 학기를 마칠 때마다 줄줄이 힘들어서 그만둔다는 버클리음대에서 그는 치열한 노력으로 생존했다. 


당시 김동률, 양파, 싸이, 윤상, 장혜진 등 쟁쟁한 한국의 뮤지션들이 다니던 시절이라 함께 재미있게 공부하고 음악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졸업이었다고 한다. 특이한 이력으로는 젊은 날 미군에 입대하여 인내와 끈기 그리고 극한의 도전을 배웠다는 점이다.


#. 사랑은 시련을 이기고도 남는다

처음에는 싱어송라이터를 희망했지만 그가 입학한 2000년도부터 컴퓨터로 작곡하는 시대가 열렸다. 장르도 영화음악만이 아닌 게임음악으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프로덕션 엔지니어링을 복수전공했다. 컴퓨터 작곡이 아직 보편화 되지 않던 시절이다 보니 졸업 후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300개의 TV쇼에 그의 음악이 들어갈 만큼 활발한 활동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NBC 리얼리티 TV쇼인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를 비롯 오프라 윈프리쇼,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 등이 대표적이다. 라이브러리 음악(다른 매체에서의 사용에 맞추어 전문적으로 제작 및 공급되는 음악​) 외에도 프리랜서로 개인작업을 병행해 나갔다. 


승승장구하며 할리우드를 꿈꾸던 그는 그러나 ‘결혼’을 하면서 두 번째 인생의 시련을 맞았다. 교회에서 그는 한 여인에게 반했다. 비록 불체자 신분이었지만 자신이 시민권자였기에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밀입국’ 케이스였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사랑 하나만 믿고 결혼을 밀어 붙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벽에 부딪혔다. 


첫 아이를 낳았는데 ‘다운증후군’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잘 나가던 프리랜서 일도 끊겨 파산을 신청하고 렌트비마저 낼 형편이 안 될 정도로 힘들었다. 아내가 힘들게 자바시장에서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 유지하던 삶에 더 큰 위기가 왔다. 당시 미국과 한국이 무비자 협정이 체결되면서 누군가가 그의 아내가 한국을 다녀오면 밀입국 케이스가 해지된다는 거였다.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 한국을 다녀와 입국하던 날 아내는 바로 추방되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28살 가장은 파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해봤다고 했다. 주 상원의원에게 레터도 보내고

탄원도 했지만 변호사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결국 그는 무작정 서울의 미국 대사관을 ‘예비군’

신분으로 찾아갔고 영사를 만나 ‘다운증후군 아이’를 엄마가 직접 키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설득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미국을 위해 군복무까지 하며 기여한 만큼 미국정부도 사면을 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화제가 되었고 20여분의 토론 끝에 전무후무하게 비자를 발급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군인과 장애인, 그리고 신분차별을 받는 이들을 존중하는 미국의 문화와 전통을 보고 뭔가 국가를 위해 기여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 다섯 아이의 아빠가 되었단다. 전 세계가 저출산 고령화로 고심하는 요즘 색다른 ‘애국’의 방법이기는 하다


#. 가족의 힘으로 재기

그렇게 '다둥이 아빠'가 되면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지니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 밖에는 더 안 

들더란다. 가족에게 먼저 충실한 음악가가 되기로 마음 먹고 가장 최우선 순위에 ‘가족’을 올려 놓았다.

더구나 그는 과분할 만큼 주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교회 공동체는 물론 여기저기에서 도움을

주고 기도에 동참해 주었으며 다둥이 아빠를 응원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힘이 났다고 한다. 


부부는 지금도 비록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났지만 첫째 세린이가 시련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가족’이 되는데 있어서 연약함을 채워주었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가족사랑에 감동한 아내가 대뜸 자신이 서포트를 할테니 대학원에 가라고 했고 이를 계기로 USC에 입학을 했다. 덤으로 얻어진 기간이었기에 그는 음악에 대한 ‘야망’ 보다는 필요한 때마다 쓰임을 받는 뮤지션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고 한다. 그가 재학시절 만든 음악영상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였다.


파란만장했던 시절을 거치고 나니 마치 인생이 폭풍 후의 고요와도 같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이 평온해지고 나니 자신이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일이 먼저 자신을 찾아 오게 되었다고. 이때부터 그의 지경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 지경이 넓어지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와 사랑을 잊지 않으니 행복이 찾아왔다. 저작권에 대한 보호정책이 탁월한 미국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이 있었고 스튜디오인 ‘M4 HUNDERD MUSIC STUDIO’를 만들었다. 개인 작업은 물론 우선 인디 아티스트들을 공략하여 녹음, 편곡, 믹싱 작업을 돕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아무래도 인디 계열의 뮤지션들은 더 까다롭고 개성이 넘치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컴퓨터 작곡의 1세대인 만큼 큰 호응이 있었다. 자유자재로 테크닉을

구사하는 그의 엔지니어링은 그들에게는 신기에 가까웠다. 그리고 서서히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게임 어플리케이션 회사이면서 세계 최고의 아바타 업체인 ‘COCONE’(Cocone Publishing)에서 연락이 와 앱, 메타버스, 디지털 아바타에 관련한 오디오 뮤직 디렉터 일을 맡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애플리케이션의 총책임자로서 음악, 사운드 작업을 하고 있다. 무려 3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업계에서 그 실력을 인정 받고 있을 정도다. 


디지털 아바타의 경우에는 유행하는 트랜드이기 때문에 본인의 음악이 탑재된 앱의 성장은 매우 보람된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본업인 ‘영화음악’을 멈추지 않았다. 우선 한국의 영화들부터 참여했다. 그가 참여한 영화로는 ‘전국노래자랑’, ‘탐정’, ‘사냥’, ‘특별시민’, ‘창궐’, ‘육사오’ 등이 있으며 미니시리즈 ‘일리 있는 사랑’, ‘부암동 복수자들’, ‘미스트리스’등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CF도 그에게는 의미있는 작업으로 한국계 미국 배우 대니얼 헤니가 등장하는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텔레비전 광고가 바로 그의 음악이며 ‘BTS WORLD’의 프로듀싱에도 참여했다. 그렇게 쉴 새 없는 일정 속에서도 일요일이면 어김 없이 ‘어바인 베델교회’의 뮤직 디렉터로서 2부와 3부 예배를 책임진다. 밴드와 현악을 콜라보레이션 하여 예배의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그의 미션이란다.


#. K-POP을 넘어서

무엇보다도 그가 지금 가장 열심을 내는 것은 아마도 소스몰에 위치한 ‘K-POP CENTER’일 것이다. 그가 정확히 판단하기로 K-POP은 기로에 서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BTS가 입대하였고 나름 매니아 층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메인 스트림에 진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MZ세대보다 더 아래 연령층들로 서서히 타겟이 옮겨가는 추세라고. 게다가 이곳 미국에서 많은 POP 작곡가들이 K-POP의 트랜디를 인용하고 있고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제2의 BTS가 되고자 공연을

오지만 안타깝게도 ‘현지화’에는 번번이 실패하고 있기에 자신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했다. 과거 JYP 등 한국의 대형기획사들이 미국에 진출했지만 새로운 스타를 발굴해 내지 못한 것도 현지 사정을 무시하고 ‘한국화’만 무리하게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요즘은 곡 하나를 만드는 데도 한 사람의 작업이 아닌 10여 명의 협업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현지화에 맞는 편곡과 전략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프로그램 디렉터로 활동하면서 이곳 미국에서 ‘K-POP’ 장르에서 한국계만이 아닌 현지인들만으로 구성된 아이돌그룹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프로그램을 공동 운영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계가 한 명도 멤버에 없는데 ‘K-POP’을 하는 아이돌그룹이 그의 손에서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현재까지 미국 현지에 맞는 시스템을 야무지게 구축했다는 점에서 매우 보람된 시간들이었다고 한다.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미리 짜여진 ‘콘텐츠 플랫폼’에 의해 3개월마다 새로운 곡을 발표하고 멤버들을

계속 바꿔주는 식이다. 최초 16주 동안은 오디션 및 기초 트레이닝을 하고 여기서 탈락자를 배출한다.

다시 남은자들을 12주 동안 추가 트레이팅 한 후 4명을 최종적으로 선발하여 아티스트로 데뷔시키는

것이 그 목표다. 따라서 3단계 트레이닝은 ‘Special Stage Star Light’이라는 명칭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라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지체 없이 ‘아카데미상 음악상’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도 미국의 주류에 도전장을 쉴새 없이 내며 장르별 ‘도장 깨기’를 하고 있다. 이 역시 한국인이면서 미국인이기에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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