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함박눈 내리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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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함박눈 내리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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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주말에 서울을 다녀 올 경우 돌아보는 코스가 있습니다. ‘뮤갤벨트(Museum & Gallery Belt)’입니다. 박물관(Museum)과 화랑(Gallery)이 모인 곳을 묶어 나름 약칭 ‘뮤갤’로 정해 봤습니다. 해당 지역은 광화문 인근 경복궁, 사간동, 삼청동, 소격동과 시청 옆 덕수궁, 정동 일대입니다.


새해 첫 뮤갤 행선지 순서입니다. 사간동 현대갤러리-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 순으로 잡았습니다. 관람시간 포함해 도보로 4시간 정도, 약 2만보 거리입니다. 첫 번째 방문지는 ‘갤러리 현대’. 전시회 타이틀은 임충섭 개인전 '획(劃)’입니다. 서예의 획과 동양철학의 기(氣) 그리고, 오일·아크릴과 같은 서양미술 재료 등을 소재로 만든 작품들입니다. 


일상의 기억과 역사가 담긴 사물을 대상으로 다양한 시도를 보여 줍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길쌈’입니다. 층고 높은 2층에 펼쳐 놓은 작품인데 자연과 문명의 만남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전통적인 베틀과 닮은 목재 구조물에서는 씨실과 날실이 한 올씩 엮여 직물이 직조되고, 중앙에는 길쌈 기계, 상부에는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모빌(Mobile)을 통하여 형태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전통적인 동양의 길쌈과 서양의 키네틱(모빌) 아트가 맞물리면서 묘한 동서양의 조화를 연출합니다.


두 번째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화가 김구림 개인전’ 입니다. 김 화백은 혁신적인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죠. 비디오아트, 설치, 판화,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날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이어진 김구림의 전방위적 활동과 거침 없는 도전은 시대에 대한 반응이었고 관습에 대한 저항이었던 바 그의 시간대를 영위하는 이들이 단숨에 파악하기에는 어려운 낯선 영역이었을 것”이라는 큐레이터의 작품 해설이 지금도 활약하고 있는 작가의 내공을 느끼게 합니다.


1970년대 후반, 종로 인사동 옆 견지화랑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을 찿아갔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연두색

계열의 비구상 계열의 그림과 판화 등이 걸려 있었지요. 1984년부터 2000년까지는 뉴욕 맨해튼 빌딩 숲에서 지내며 자연에 대한 순수한 동경을 품은 회화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했죠. 사물과 시간의 관계성을 탐구했다는 그의 이번 개인전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미술의 범주를 넘어 무용, 연극,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스톡하우젠의 전자음악에 맞춰 김구림이 무대 위에서 옷을 뒤집어 쓴 사람을 빨랫방망이로 때리는 해프닝(명동국립극장,1971), 백남준의 작품’피아노 위의 정사’의 연출, 그리고 이상의 ‘날개’에서는 안무, 의상, 무대미술까지 총괄했다는 기록도 나와 있습니다.(세종문화회관,1981). 존 케이지의 음악으로 100명의 무용수와 함께 계획했던 공연도 다소 축소된 형태로 공연하기도 했답니다.(‘잘 알지도 못하면서’, 2013).


마지막 전시장인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구본창 사진전, 항해(Voyage)’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1979년 독일 함브르크로 유학을 떠났던 그였죠.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투영했다고 합니다. 낯선 유럽 도시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던 그는 1985년 한국으로 귀국, 서울의 곳곳을 카메라로 기록한 ‘긴 오후의 미행’을 제작하기도 했죠. 작가 부친의 임종 직전 가뿐 호흡을 몰아쉬던 얼굴을 기록한 ‘숨’을 비롯, ‘백자’, ‘문라이징 달 항아리’시리즈 등 한국적 소재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지요.


“익명자로서 세상 이곳저곳을 다니며 발견한 대상, 풍경을 포착했다”는 그의 고백이 작품들 앞에 한참을 서게 합니다. 자신의 사진은 “생각과 마음이 따라가는 하루 하루의 기록임으로 일기를 쓰는 것과 다르지않다. 이번 회고전도 익명자로서의 새로운 항해의 출발이다”라고 의중을 말했습니다.


새해 첫 뮤갤 순례길을 돌아보며 세 작가의 공통점으로 소환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파토스’입니다. 무엇이 감동을 일으키는 것인가. 예술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가지고 감동을 주는가. 예술에서

감동을 주는 것은 오직 진정한 파토스(Pathos;열정, 격정, 애수, 비애감)뿐이다”라는 챨스 처칠의 말입니다.(김성우著, 명문장의 조건 22쪽, 2012). 일정을 마치고 미술관 문을 나섰습니다. 함박눈이 시야를 가릴 만큼 펑펑 쏟아지는 1월의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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