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백전명장 쟈니 리, 언제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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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32-2> 백전명장 쟈니 리, 언제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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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쟈니 리. /엄영수 제공

#. 물 건너간 쟈니 리 물 건너오다

양아버지의 임기가 끝나 미국으로 돌아갈 때 아들 쟈니 리는 함께 테네시주로 날아갔다. 이로써 쟈니 리는 한국국민으로서 한국생활은 완전히 정리했다. 미국에서 새 생활을 할 생각에 꿈에 부풀어 있었다. 소위 말하는 물 건너갔다는 얘기다. 그런데 양아버지는 은퇴를 했지만 미국정부가 필요에 의해서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한국으로 발령을 냈다. 쟈니 리는 양아버지를 따라서 그리운 고국에 돌아왔다. 이때는 떠날 때의 쟈니 리가 아니라 완전히 철이 든 성인 쟈니 리가 되어 있었다. 한국을 잊지 않고 한국이 마음 속에 남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국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다짐한다. 물 건너왔다는 얘기다. 


"양아버지는 내가 17살 때 식도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도 20년전 식도암이 발견돼 항암과 수술로 지속적인 치료를 했다. 지금은 완치판정을 받아 건강하게 생활하고 노래에 전념하고 있다. 음식을 규칙적으로 먹지 않거나 많이 먹는 것을 조심할 일이다. 아버지와 나는 친족이 아니기 때문에 DNA가 일치하지 않고 유전자도 틀린다. 그런데 왜 같은 식도암이 왔을까? 우리는 세상에 가장 가까운 아들과 아버지였다.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모든 것을 공유했다. 그러다 보니 식도암도 DNA도 결국 통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가수 쟈니 리의 회고. 13살 때 만난 양아버지는 아들을 장교클럽에 자주 데리고 다녔다. 쇼는 재미있고 신기했고 음식도 맛있어서 즐겁게 따라다녔다. 아버지가 피아노 치는 모습, 노래하는 목소리를 먼발치서 가까이서 등 뒤에서 어깨너머로 오랫동안 보고 들으니 자연스럽게 몸에 익숙하게 됐다. 따라 부를 수도 있게 되었다. 어느 날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데 마치 옛날부터 공부를 했던 것처럼 시키는 대로 바로 재연을 할 수 있었고 정확하게 표현이 되었다. 따라하던 나도 놀랬고 손도 같이 놀랬다. 무엇인가를 새로 배우면 이론은 알더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서는 숙달과정이 절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하게 된다. 선천적으로 음악에 관한한 별로 연습 없이 바로 실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편이다. 남보다 눈썰미가 뛰어나다 할까 이러한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전쟁고아가 되어 길바닥에 버려진 불쌍한 탈출 소년에게 양아버지 의인을 보내 구원해 주시고 음악을 알게 해 가수까지 만들어 봉사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북한에서는 예배를 하다 적발되면 크게 처벌을 받는데도 숨어서 몰래 예배를 드렸으며 불안 초조하고 겁이 났지만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같이 예배하던 성도 중에 누군가가 변심을 해서 신고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그런 적은 일생에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 쟈니 리 스타탄생! 동시에 금지곡 판결!

연예계 진출을 물색하던 쟈니 리는 1957년 '쑈헌트'라는 한국인 단체에 부산에서 입단에 성공했다. 극장에 놀러 갔다가 친구가 팝송을 잘 부르는데 한 번 보시라고 추천하여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 합격! 한 번에 단원이 됐다.


폴앙카의 다이아나 씽씽씽씽을 즐겨 불렀다. 가요계 판도는 극장쇼가 대세였다. 대형쇼를 할 수 있는 큰 극장도 업소도 아직 없을 때였다. 송민도 선배가 무대에서 노래를 하던 시절 현인, 김정구, 남인수 선생이 현역 최고 인기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였다.


데뷔는 화려하게 단숨에 성공했으나 명성을 얻기까지는 또 다른 고생이 필요했다. 데뷔 10년 차까지도 어려운 생활이 계속됐다. 1966년 일본에 자주 왕래하던 서영은 선생의 '뜨거운 안녕', 길옥윤 선생의 '내일은 해가 뜬다' 두 곡을 취입 발표하여 대박을 터트렸다. 전국을 강타한 인기절정의 노래 이 노래로 완전 스타덤에 올랐다. 내일은 해가 뜬다는 더 폭발적으로 인기몰이를 했으나 당국의 검열에서 가사불량으로 걸렸다. 


내일은 해가 뜨니 희망을 갖고 오늘의 좌절이나 슬픔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좋은 내용이다. 그러나 심의당국의 생각은 천지차이로 달랐다. 이미 해가 떠서 나라가 잘 나가고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밝은데, 왜 헛소리를 하냐는 것이다. 조국 근대화 새마을운동으로 승승장구 하는데 해가 안 떠서 어두운 나라처럼 되어 버렸다고 제재를 했다. 심의에서 금지곡 판결이 나면 모든 방송언론에서 노래는 퇴출되고 가수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그 시대에 문공부 그리고 심의위원회 윤리위원회는 대단했다.


너무 억울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수습에 도움을 준다. 미국에 갈 때 주로 시애틀, 타코마, 엘파소뉴욕 등지를 자주 갔다. LA는 많이 가지를 못했다. 미국에 있을 때 한 번은 뉴욕에서 하와이 동포사회에 위문공연을 갔다. 공연하고 나니 출연료를 갖고 있던 매니저가 사라졌다. 당장 노숙자가 됐다. 1주일 이상 노동을 해서 여비를 벌어 뉴욕에 돌아왔다. 이런 일을 여러 번 되풀이 했다. 언제나 믿으니까 그렇다. 우리끼리는 서로 믿고 도와야 한다. 상생해야 한다. 우리끼리 상처를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지금도 매니저를 믿는다. 지금은 동포사회에서 사라진 이야기이다. 심의를 받는 가수와 심의를 하는 기관이 서로 믿음이 있으면 이런 오해는 없을 것이다.


#. 금지된 명곡, 해금으로 보상받다

퇴폐풍조 단속, 장발 단속, 가정의례준칙위반 단속, 금지곡 처분 규제와 처벌이 수 없이 많았다. 불평불만도 있고 투쟁과 항의와 시위를 하고도 싶다. 그럴 때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내 지론이다.


세상에는 나보다 못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최면을 건다. 나는 미국 영주권자다. 모든 일에 다투지 않고 미국에 가서 조용히 추스린다. 표현이 능사가 아니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운명을 받아들인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다. 운명과는 대화한다. 어차피 모든 일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다. 20여 년이 흐르고 나서 내일은 해가 뜬다는 '사노라면' 이란 노래로 제목을 달리해서 금지조치가 해제되어 다시 불려졌다. 지금까지 불린다. 명곡은 누구라도 알아본다. 손해도 있었고 상처도 생겼고 마음고생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팬들은 알고 있다. 그것이 충분한 보상이다.  


#. 공연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극장쇼가 연예인 인기를 말해줄 때 60년 대 중반 쟈니 리-정원 콤비는 흥행 100%였다. 전국의 쇼무대를 주름잡았다. 그 다음에 남진, 나훈아가 나왔고 팬클럽이 생겼으며 전국조직을 만들어 기획사에서 관리를 했다. 지금은 가요제에 입상하면 자동으로 팬클럽이 만들어져, 버스를 동원해 공연장마다 팬들로 세 과시를 한다. 인터넷 덕분이다. 


팬의 성향도 어머님 아버님 성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집을 나왔다며 안들어 가겠다고 생떼를 쓰며 따라다니는 여대생 팬들이 더러 있었고, 종이학 수 천 마리씩 접어서 선물하는 팬도 많았다. 요즘 편지 보기 힘들지만 그때는 러브레터가 수도 없이 날라왔다. 그 시절엔 건달 깡패 불량배 조직이 연예계에 밀착돼 있었다. 이들은 또 어디엔가 윗선과 연결이 돼 있었다. 자유당 정부 때, 이정재 임하수 사건도 있지 않은가? 업소 지방쇼 극장쇼를 가면 어김없이 나타나 강제로 일을 시키는 행위, 출연료를 갖고 행방을 감추는 일, 스타 연예인을 업소 돌리느라고 레코드 취입할 시간조차 안주는 일, 2곳을 계약하고 5~6곳으로 늘리기, 인기 관리비, 신변 보호비, 경호비 등 갖은 명목으로 스타 연예인 출연료를 갈취하는 사건이 많았다. 


결국 5공 때 연예인을 괴롭히는 범죄조직 일제 단속이라는 철퇴를 맞게 된다. 연예인 테러사건도 자주 있었는데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던 시절이라 몸 다치지 않고 장수하며 살아 남은 것만도 감사한 일이다. 


한없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미국의 양아버지! 늘 고마운 마음 감사한 생각을 갖는다. 은혜와 사랑 관심 친절 위로 격려 갚을 수 없을 만큼의 보호와 배려를 모두 주고 가셨다.


어느 날인가 문득 보고싶다. 그립다. 살아계실 때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제대로 보답한 일이 없다. 인간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주고 간 아버지의 위대함을 나이가 들면서 새삼 더 절실히 느낀다. 나도 그 길을 가게 해달라고 매일 하나님께 기도한다. 아버지를 만난 것을, 세상의 가장 큰 선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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