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디미 40년 연예비사 백전명장 쟈니 리, 언제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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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디미 40년 연예비사 <32-1> 백전명장 쟈니 리, 언제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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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리(왼쪽)와 엄영수.   /엄영수 제공


#. 할머니의 명령, 북한을 탈출하라!

1966년 한국가요계 최대의 히트송은 '뜨거운 안녕'이었다. 이 노래를 부른 주인공은 미남가수 겸 패션모델 출신 쟈니 리! 이국적인 마스크, 훤칠한 키, 기타를 둘러맨 모습을 보면 너무 멋있다. 예술가다운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본명은 이영길. 1938년 만주 길림성에 태어났다. 


평양 출신 어머니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다재다능했다. 가무가 뛰어난 대중예술인이었을 텐데 당시에는 기녀라 불렸다. 아버지는 중국계였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와 일찍 헤어졌다. 당연히 좋은 기억이 없다. 이곳저곳 사람 많이 모이는 곳을 다니며 일하시던 어머님이 “영길아, 엄마가 일하고 오면 맛있는 평양냉면 같이 먹자. 할머니랑 잘 놀아.” 


평남 진남포 외가에 아들을 맡겨 놓고 간 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계속되는 미군의 폭격으로 북한 전역은 초토화됐다. 인민군이 기거할 수 없도록 건물과 가옥을 산산조각냈다. 인민군이 일반인 복장으로 위장, 유엔군을 속이고 부대이동을 하니 사람이 단체로 움직이면 공산군으로 간주해 집중공격을 했다.


6.25가 터진 1950년 한꺼번에 몇 백명씩 죽는 광경을 보았다. 전쟁이 격해지자 진남포교도소 죄수들을 모두 처형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북한은 식량과 연료 모든 물자가 바닥이 났다. 전투기는 아예 없었다. 한 대도 뜨지를 못했다. 진남포 사람들은 곧 공산당이 망할 것이라 했다.


공산당 망하기 전에 이대로 있으면 어차피 다 죽는다. 외할머니께서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야 산다며 북한을 탈출하라 하셨다. 진남포 앞바다는 수심이 너무 얕다. 먼바다에 있는 미군 수송선 LSD에 크고 작은 보트들이 부지런히 주민들을 실어날랐다. 이틈에 끼어 몸만이라도 배를 탄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요 행운이었다. 


이 와중에 가진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은 고민했다. 재산을 그대로 두고 미래를 위해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 떠나면 재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결과는 예정돼 있다. 갖고 갈 수 있는 최대치를 다 갖고 간다는 것이다. 목선이나 돛배를 구해 가족전용선으로 하고 북한을 떠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바다를 모르면서 항해 장비나 기술이 열악한데 준비 없이 나선 뱃길은 춥고 배고프고 악전고투 사경을 헤매게 되는 상황 그대로였다.


감시선을 만난다. 해적은 없었겠나? 오폭이나 오인사격을 받을 수도 있다. 99% 모두 죽었다. 아무 것도 없이 맨몸 하나 달랑 싣고 온 사람들은 살아 남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전 재산을 다 싣고 배를 몰고 온 사람은 깊은 바다에 통째로 수장되고 말았다. 욕심은 언제나 화근이 된다. 


#. 쟈니 리의 명령, 열악한 고아원을 탈출하라!

드디어 남한 땅 부산에 도착했다. 광한리에 있는 난민수용소에 보내졌다. 갇혀 있는 게 갑갑했다. 어떻게 될 지 앞 날이 궁금했다. 앞으로 펼쳐질 세상을 빨리 보고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보자. 북한 탈출에 이어 수용소 탈출을 감행했다. 자유롭게 부산 시내를 다니며 놀았다. 겁도 없었다. 아니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단속되어 happy mountain orphan이라는 고아원에 넘겨졌다.


미국인이 전쟁고아를 위해서 만들었지만 전쟁 중에 고아원은 통제, 관리에 허점이 많았다. 힘 있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힘 없는 아이들은 매일 매나 맞고 시키는 사역을 다해야 하고 시중들고 간섭받고 괴롭힘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세번째 탈출을 시도한다. 이번에는 부산역 광장에 갔다. 왜 나갔는지 무슨 일이 전개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우연히 한 미국인을 만났다. 처음부터 어린 소년을 좋게 봤다. 친절하고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다. 가난한 나라의 전쟁고아에게 자선을 베풀고 싶어서 한국에 온 것 같이 극진히 아껴 주었다. 부산항 제1부두에서 7부두까지 전 지역 미군을 담당하는 총책임자였다. 만나자마자 제3 부두 사무실에서 숙식을 할 수 있게 조치했고 양아버지로 후견인이 돼 주었다. 파격적인 일이다. 


미국인 양아버지는 덴마크계로 미국에 이민하여 시민권자인 라스문센이란 분이다. 장성급 대우를 받는 고급장교였다. 부산캠프 하이얼리어 부대에 근무했다. 당시 이 부대 클럽에는 가수 한명숙이 17캔디를 자주 불렀고 무용수로 현미가 출연하고 있었다.


#. 6.25는 왜 일어났는가?

양아들의 이름을 쟈니 리라고 지어 주었다. 북한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다녔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6학년에 해당한다. 부산 대신동에 있는 서울대신피난국민학교 6학년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에는 당시 정계 실세였던 이기붕 국회의장의 아들 이강석이 사범중학교 1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가 됐다. 부산에 피난 내려와서 등교할 때는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고 한다. 전쟁이 벌어져 공산당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부산으로 쫓겨가 있으면서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 일이다. 나라의 위기를 직접 겪고 있으면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왕조시대에도 없던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을 볼 때 그 시절의 정치수준이나 국민의식이 얼마나 저급했는가를 알 수 있다.


쟈니 리는 양아버지를 잘 만난 덕에 아버지의 고급 자가용인 캐딜락을 타고 학교에 다녔다. 원해서도 아니고 자기능력도 아니다. 순전이 운명이다. 한국전쟁이라고 불리는 6.25 동란은 세계적인 전쟁이다. 16개 국이 참전해 유엔군을 결성했고, 냉전시대에 민주주의 공산주의 최강의 세력이 맞붙어 장기간 싸웠으며 양측은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아직도 휴전상태일 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핵무기까지 계속 만들어 낸다.


이러한 큰 전쟁을 치르는 나라가 후방에 있는 피란처 부산에서의 생활은 마치 태평성대 평화시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여서 왜 전쟁이 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여실히 말해준다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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