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나주곰탕 거리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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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나주곰탕 거리의 변신

웹마스터

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새벽바람이 제법 차갑습니다. 이럴 때 쯤 생각나는 음식이 있습니다. 곰탕입니다. 그 중에서도 흔히들 나주곰탕을 꼽는 편이지요. 흔히 서울이든 제주든 나주곰탕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집 치고 들어갔다 크게 실망한 적은 드물다라는 말들을 하지요. 필자의 경우, 평소 KTX나 SRT 고속열차를 타고 서울을 다녀올 경우, 전남 나주역을 이용합니다. 이날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주곰탕 잘 한다는 식당을 찿아갔습니다. 소고기를 고아낸 맑은 장국이 떠오르는 나주곰탕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궁굼했습니다. 


나주 토박이면서 객지를 떠돌다가 나주로 귀향한 전직 방송국 PD 송일준 말에 의하면 “1930년대 일제가 전남 나주에 지은 군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곰탕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나주에 있던 통조림 회사(화남산업)에서 일본군에 납품하는 소고기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을 얻어 끓여 팔던 것이 시초입니다”라고 합니다.(‘나주수첩’ 송일준, 2022).


나주 읍내 금성관(고려시대, 사신이나 고위 행정관리들이 묶어 가던 영빈관)앞 곰탕집에서 한 그릇 주문했죠. 머리고기, 양지, 사태, 목심을 넣고 삶아 고아낸 맑은 국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와 함께 나옵니다. 밥은 그냥 만 것이 아니라 토렴한 것이지요. 토렴은 찬밥에 국물을 부었다가 따르고 다시 붓는 일을 되풀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밥알마다 국물이 스며들어 맛이 진해지고 탱글탱글해 진답니다. 숟가락 가득 고기와 밥을 담고 김치 한 조각을 얹은 다음, 아무렴 곰탕은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지…하면서 곰탕을 가리켜 어떤 이는 나주곰탕을 인생의 소울푸드라고도 했습니다.


그 날, 필자는 곰탕 한 그릇 달랑 먹으려고 간 것은 아니고요. 찿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흐름, 열 개의 탄성(Ten Excitements)’이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는 ‘영산강 국제 설치미술제 2023’전시회 입니다. 15명의 국내외 작가의 작품들이 곰탕거리 인근의 옛 통조림공장, 舊 나주역사, 나주향교, 정미소 등 십여 장소에 설치되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일 대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역사, 장소, 사람, 친환경 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업사이클 소재로 만든 작품들이었습니다.


작가 민성홍은 일상생활에서 버려진 소재들을 활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탄생시켰습니다. 버려진 산수화들을 천에 인쇄한 후 텐트 형태로 천정으로부터 늘어뜨린 형상입니다. 부유하는 듯한 이미지를 강조했습니다. 텅 빈 통조림공장 벽을 배경으로 설치됐습니다. 옆 건물 미디어 아트 공간에서는 오래 전 일제시대

쇠락한 공장 건물 내벽을 대형스크린 삼아 영상작품을 투사했더군요. 어두컴컴한 공장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화면 앞 중앙, 보랏빛 스포트 라이트 밑에 ‘책 읽어주는 소녀’ 조각이 놓여 있습니다. 


소녀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소녀의 이야기에 따라 폐공장 내 흰색 대형벽면의 영상은 점차 바뀌어 갑니다. 평화로운 마을, 산천, 산과 들판 이어서 전쟁으로 파괴된 풍경으로 바뀝니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처참한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작품 내 소녀의 꿈은 전쟁보다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나타내는 듯한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요즘 한창 교전 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고함소리와 교차되는 듯

합니다. 엔딩 부분은 평화롭게 눈이 내리는 풍경과 평화로운 산천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책 읽어주는 소녀가 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으로 막을 내립니다.(이이남 作, 책 읽어주는 소녀, 023). 나주향교에서는 팝아트 계열 작가 김경민의 ‘I love you’가 나타납니다. 고건축인 명륜당을 배경으로 잔디밭에는 가족의 단란함, 행복함이 아크릴 소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당 앞 수령 600년 된 비자나무가 의연하게 서서 시간의 간극을 좁혀주는 듯 합니다.


이밖에도 공공장소 여러 곳에서 역사투어와 예술투어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나주라는 지방도시에 펼쳐놓은 예술감독 백종옥의 활약을 볼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방한 중인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관장 ‘사비네하그’의 언론 인터뷰 내용이 생각납니다.


한국전시 기획자들의 창의력과 상상력,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은 같은 업계의 다른 나라의 큐레이터들이 보고 배울만 한 점이 많다. 수백년 전 그려진 그림이나 오래된 사물도 다시 살아 숨쉬게 하고, 모든 공간들을 아주 영리하게 쓰는 모습이 경이로운 수준”이라고 찬사를 보냈더군요. 맛있는 곰탕 한 그릇과 함께 국밥 떠담을 때의 ‘토렴’처럼 탱글탱글해 진 작품들을 보면서 유쾌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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