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헌법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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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헌법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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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爲天)” 사마천의 사기 역생열전(史記 酈生列傳)에 있는 글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人乃天),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여기는 것이 정치의 본분이다. 옛 봉건왕조에서도 그렇게 믿었거늘, 하물며 법치주의를 내세우는 현대 민주국가임에랴? 나라의 뿌리는 국민이고, 국민의 인권은 하늘에 닿아있다. 이른바 천부(天賦)인권론이다. 국민의 권익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 법치국가다. 법치는 정치에 앞서는 하늘의 명령이자 권력에 우선하는 인간 본성의 제도라는 뜻이다. 


무릇 자유·민주·공화의 나라는 헌법제정권력의 주체인 국민의 결집된 의지로 탄생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정에서는 불행하게도 우리 국민이 헌법제정의 주권을 행사할 기회가 없었지만, 1948년 대한민국 건국에는 5·10 총선거라는 헌법제정권력의 주권적 결단이 있었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국민이 먼저 제헌국회를 구성했고, 그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한 것이다. 헌법이 정부보다 앞서고 법치가 정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치욕적인 신탁통치를 받겠다면서 전국 총선거를 거부한 북한이 이미 사실상의 정부(de facto government)를 꾸려 운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렵사리 찾아온 광복의 기쁨을 또다시 신탁통치의 굴레 속에 파묻을 수 없었던 남한 민중에게는 오직 하나의 선택만이 있었다. 남한 단독 총선거였다. 그 선거로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구성됐고, 그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으며, 그 헌법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선거와 민주정치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해방공간에서,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꿰뚫어보고 당시로서는 낯설기만 한 자유민주공화제의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민주국가를 세운 선인(先人)들의 예지(叡智)는 놀라울 따름이다.


헌법이 있기 전에는 오직 국민만이 헌법제정의 주권자로 존재할 뿐, 국회도 대통령도 사법부도 모두 헌법에 의해 비로소 존재가 가능해진 헌법의존적 직분에 불과하다. 주권자인 국민도 헌법의 지배를 받는 터에 ‘그놈의 헌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초헌법적 권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송사가 여러 건 걸려있는 재벌기업 법무팀에게 대법원장 공관을 만찬장소로 제공하는 따위의 행태도 법조계 스스로 법을 업신여기는 법치유린이나 다름없다.


나라가 어지러운 것이 헌법의 잘못 때문인가? 아니다. 사람의 잘못, 정치의 잘못, 권력의 잘못 때문이다. 편할 편(便)자는 사람 인(人)에 고칠 경(更)을 쓴다. 사람을 고쳐야 나라가 편안해진다. 제도를 탓하기 전에 권력을 가진 자들의 마음씨부터 바르게 고칠 일이다. 민주국가의 근간은 법치주의요, 법치주의의 뿌리는 헌법이다. 헌법정신을 그르치는 권력의 횡포는 하늘의 뜻과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독선의 폭력이다.


우리의 법치는 안보와 경제발전을 앞세운 권위주의 체제, 민주와 평등의 깃발을 내두르는 포퓰리즘의 득세로 흠집투성이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불과 40년 동안 헌법이 아홉 번이나 바뀌었다. 헌법이 불편한 정치상황이라면, 헌법을 고치기보다 정치상황을 헌법에 맞도록 고쳐나가는 것이 순리일 터임에도, 권력에 굶주린 정치꾼들은 언필칭 시대정신을 앞세워 헌법을 마구 뜯어고치는 반칙(反則)의 개헌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헌법은 무수한 시대, 격랑의 세월들을 거쳐 오면서 역사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국민적 경험의 정수(精髓)이자 주권적 결단의 결정체다. 그것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헌법 전문, 제4조)를 바탕으로 하는 헌법의 자리다. 저마다 외쳐대는 한 때의 시대정신으로 어찌 헌법정신을 거스를 수 있는가?


70여년 헌정사에서 우리 국민은 권력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일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해왔고, 그 모진 경험을 헌법으로 구현해냈다. 헌법이 무슨 일을 하라고,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피와 땀과 눈물로 써내려온 쓰라린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제헌절 73주년을 맞는 이 달, 나라의 권력담당자들은 헌법의 자리를, 법치의 의미를 엄중하게 되새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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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니스트: 변호사로 현재 숙명여대 석좌교수로 있다.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중앙법원장 등 법관으로 근무하던 3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문학, 철학 등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현재는 PEN International, Korea 회원으로서 인권위원장을,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서 문인권익옹호위원장을,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를, Seoul National Symphony Orchestra에서 명예지휘자를, FEBC(극동방송)에서 신앙 칼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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