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박종환 감독님! 천국에선 명랑축구로 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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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29-1> 박종환 감독님! 천국에선 명랑축구로 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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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순천향대 부속 서울병원에 마련된 박종환 감독 장례식장에서 엄영수.   /엄영수 제공

#. 세계축구인의 애도 속에 박종환 감독 잠들다

한국 대표팀과 20세 이하(U-20) 대표팀 K리그 클럽 등을 이끌며 오랜 기간 뛰어난 지도자로 한국 축구역사에 기여했던 고인이 세상을 떠난 것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전 세계 축구인을 대표해 유가족과 그를 사랑했던 모든 분에게 위로를 드립니다. -지안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회장

 

지난 9일 밤 8시. 빈소가 차려진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엔 조문객이 별로 없다. 가을 날씨마저 쌀쌀했다. 빗방울까지 더해 을씨년스러웠다. 곡소리는 들리지 않고 향불의 재는 계속 떨어진다. 초상집이 초상집다워야 유족의 슬픔을 달래고 조문객을 감사히 맞이 하는 느낌이 들텐데…. 그래도 박종환, 아직도 박종환, 국민영웅 박종환인데 우리시대 영웅을 너무 초라하게 보내는 것은 아닌지. 


10일 오전 10시 발인식이 치뤄지는 축구회관. 정몽규 축구협회장을 비롯한 임원진 신연호 이상윤 황선홍 허정무 등 박종환 감독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협회원들이 고인을 축구계의 거목, 원로로 존칭하며 애도했다.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벌떼처럼 그라운드를 휘젓는 대한민국의 기동성에 감탄해 세계 언론은 '붉은악령'(Red Furies)이란 탄성을 보냈고, 그것이 발단이 돼 붉은악마가 탄생했다. 그 붉은악마는 다 어디에 있나? 박종환 감독의 마지막 가는 길은 너무 허무했다. 아쉬움에 생각이 많은지라 눈물도 잊은 채 바라만 보았다. 

  

#. 미군부대 하우스보이가 만든 4강 신화!

딸 박성숙의 회고: 집안 식구들은 아버님이 집안 일에 신경을 안쓰도록 매사에 조심했고, 항상 조용히 지냈다. 경기가 있게 되면 아버님보다 식구들이 더 긴장한다. 초조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누구도 내색하지 않는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생활할 뿐이다. 대화 중에 불경한 단어나 부정적 얘기들은 무조건 피하고 본다. 이웃과 사소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된다. 아버님이 식구들과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하고 일에만 전념하며 사는 것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 스스로 불편 없이 사는 법을 자연적으로 터득하게 되었다. 


식구들에겐 화기애애했고 다정다감했고 모든 걸 다 주시는 다 이해하시는 인자하신 아버님이셨다. 1938년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셔서 1945년 강원도 춘천으로 월남하셨다. 생활이 어려워 중학교 때부터 인근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들어가 세탁과 청소를 했는데 이 무렵에 축구재능을 발견했고 영어회화를 빨리 배워 외국인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고생이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성공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960~70년대 일찍 축구 국제심판 자격을 얻어 경기진행을 위해 자주 외국에 나가셨다. 


엄영수: 인간사 새옹지마라 가난 때문에 다닌 미군부대가 국제심판, 명감독을 만들었다. 남보다 먼저 세계축구를 알게 되고 한국축구의 발전 청사진이 그려졌을 것이다. 선진국의 전략과 전술 훈련방법과 기술을 공부하며 그는 월드컵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 기간은 축구강국 여러 나라에 유학을 갔다온 것과 다름없다. 드디어 세계 4강 신화 준비가 끝났다.


#. 국민영웅에게도 왕따가 있냐? 없냐? 뭐냐?

그라운드에서 너무 격하게 항의하거나 어필하여 수 차례 퇴장 또는 출장정지를 당했다. 극한상황에서는 사직을 강요받기도 했다. 멕시코(U-20) 세계 4강 신화는 어디로 가고 1989년 일화 프로감독을 맡기 전에는 감독은커녕 코치도 맡지를 못했다. 설 자리가 없었다. 박종환 감독이 왕따를 당한다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박종환 감독과 이주일 코미디언이 만나면 나이로 다투고(같은 학년 춘천고 축구부 2살 차이) 폭탄주로 다투고 축구이야기로 다투고 웃기기로 다툰다. 양보가 없다. 어떤 때는 육박전도 불사했다. 우리만 봤다. 절대 비밀이다. 밖에 나가면 서로 이겼다고 밀어 붙인다. 취한 상태였으니 서로 모른다. 역시 대단한 승부사다. 


이주일 선배께서 늘상하는 얘기. “내 친구라서가 아니라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그럼 왕따의 까닭이 뭐이냐? 있냐? 없냐? 왜 없냐? 박종환 감독 일이라면 그냥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니까. 그러니까 벌떼축구가 나온거 아니냐, 으흥흐흐…. 벌 때 많이 벌어 놔라! 늙으막에 없으면 슬프다니까? 그땐 서로 부둥켜 안고 많이 웃었다. 이제 늙으막 빈손이 되니 정말 너무 슬프다. 


#. 박종환 감독 기울어진 운동장에 헤딩하다

김흥국의 회고: 모 방송국에서 박종환 어르신 서거에 특별출연을 요청해서 정말 어렵게 녹화를 해드렸는데, 아침신문에 개그맨 엄영수, 가수 김흥국도 영결식에 참석한다고 광고까지 때려 놓고 방송시간 직전에 연예인 출연 부분은 편집해서 뺐더라구? 내가 들이대 출신인데, 이럴 땐 진짜 어떻게 한대? 이래두 된대? 물론 내가 어쩌겠어요. 참는 대, 좀 더 경건하게 위엄있게 할려고 바꿨겠지요. 감독님 사랑하니까, 다 이해합니다.


당시 우리 축구의 환경이나 기술이 세계 벽을 못 뚫고 있었는데, 유격훈련 지옥훈련 마스크훈련 벌떼훈련으로 맨땅에 헤딩 한 번하니까 그냥 뚫린거 아닙니까. 축구판이 뒤짚어진 거예요. 축구혁명을 일으킨 겁니다. 맞잖아요? 박종환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선수에게 과격하다. 심판에게 도전적이다. 경기운영에 불만이 많다. 그러는데 그럼 왜 그러겠어요 아무 문제 없는데 그랬겠어요. 블공정 편파적 기득권 뭐 이런게 있으니까 이걸 개선하자. 좋게 하자고 들이댄 거예요. 


평생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으려고 외롭게 혼자서 몸부림치다 가신 거란 말입니다. 그 부분도 남은 우리가 숙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제가 용산 사는데 어르신은 효창운동장을 자주 이용했어요. 거기서 저 하고 은퇴하고도 시니어 축구로 하루 4게임 씩 뛰셨어요. 정말 축구를 너무 사랑하신 분입니다. 박종환 어르신 저 흥국이 정말 어르신 존경합니다. 아주 편안히 잘 가십시오. 어르신 사랑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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