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훈의 속닥속닥] 여름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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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훈의 속닥속닥] 여름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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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아카시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숨이 턱턱 차오르고 등골에 땀이 삐질삐질대는 게 계절의 수레돌림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하기야 초복(初伏)이 지나  중복(中伏)에다 대서(大暑)가 코밑이니 이치상으로도 가위 ‘불의 계절’임에 틀림없다. 해서, 복중(伏中)에 놀란 송아지가 달만 보고도 헐떡인다든가. 오죽하면 두보(杜甫·712~770) 같은 점잖은 시인도 ‘관복에 띠까지 매고 있으려니 미칠 것 같아 큰 소리로 울부짖고 싶다(束帶發狂欲大叫)’고 무더위를 규탄(!)한 뒤 ‘어떡하면 겹겹이 쌓인 얼음을 맨발로 밟아볼 수 있나(安得赤脚踏層氷)?’고 했을까.


#요즘이야 선풍기다, 냉장고다, 에어컨이다 해서 철없이(?) 살고들 있지만 사실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여름나기가 쉽지만은 않았던 터.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찾아온 민족이 아니던가. 하물며 그까짓 더위쯤이야…. 예전 우리네 여름나기의 비결 아닌 비결은 모두 자연의 원리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먹새며, 입성이며, 삶터 등 모든 게 자연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오랜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한 지혜일 테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원리를 교묘하게 찾아내 실용화한 슬기는 오늘에도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우선 사는 집부터 더위를 식히기에는 그만이었다. 두터운 지붕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열을 차단하는 데다, 안마당이 공기의 대류를 일으켜 대청마루 뒷문으로 빠져나가도록 돼 있어 늘 바람 속에 살게끔 돼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더위쯤은 마룻바닥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혹여 햇살이 들 때는 발을 치면 그만이니, 죽부인을 껴안고 한숨 늘어지게 낮잠이라도 잘라치면 비록 삿자리에 누웠어도 화문석 등메인 듯 달콤한 그 맛이라니…. 고려 때 대문장 이규보(李奎報·1168~1241)선생이 여름날의 서정을 ‘주렴 장막 으슥한 곳 나무 그늘 옮아들고/ 드르렁 드르렁 낮잠이 무르익다/…/ 격자창 대자리에/ 적삼바람으로 누었다가/ 꾀꼬리 소리 두어 번/ 단꿈이 동강났네(簾幕深深樹影廻/ 幽人睡熟鼾成雷/…/ 輕衫小簟臥風欞/ 夢斷啼鶯三兩聲)’라고 읊은 소식을 알만 하지 않은가.


#어디 그뿐이랴, 입성은 또 어떻고. 등거리 잠방이 차림의 민초들을 보라. 소매도 없이 등판만 가릴 정도의 등거리, 가랑이가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잠방이 패션에다 베로 만들어 맨살에 그대로 걸쳤으니 보기만 해도 절로 땀이 사라지는 느낌일 테다. 특히 샅만 가릴 정도로 가랑이가 짧은 쇠코잠방이는 더 이상 말해 무엇 하리오. 민초들의 패션이야 워낙 없는 살림에 맞춰 짜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치자. 하면, 체면치레로 사는 지체 높은 사람들의 여름옷은? 이 역시 품위를 살리면서도 시원함을 추구했으니 그 절묘한 멋스러움은 오늘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남정네들은 모시나 베로 고의와 바지에 두루마기까지 해 입었고, 여인들은 고운 세모시 치마저고리나 생견(生絹)으로 만든 깨끼 치마저고리로 한껏 멋을 부렸는데, 뽀얗게 바래거나 엷은 하늘색으로 물들여 보기도 그렇거니와 바람도 잘 통해 시원하기가 그만이었다. 속치마 밑에는 단속곳을 입으며 속곳은 바지 맨 밑에 받쳐 입어 속속곳이라고 하는 데 이 역시 생모시로 해 입고는 했다. 하지만 예전에도 호사바치들은 있게 마련이어서 이 같은 복장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등나무나 칡 줄기로 얼기설기 배자 모양으로 만든 특수 등거리를 속에 받쳐 입기도 했다. 


#여름철에는 특히 고된 농사일도 많으려니와 땀을 많이 흘려 건강을 해치기 쉬워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먹거리였다. 예전부터 오이와 가지, 호박 등 여름철 단골 식품 말고도 단오(端午), 유두(流頭), 칠석(七夕)과 삼복(三伏) 등 절기에 맞춰 ‘시절음식(節食)’을 만들어 먹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기 위한 계절 식단이 있었던 셈이다. 여름철 음식 중 하이라이트는 역시 복달임. 복(伏)은 오행상생의 원리에 따라 성하(盛夏)의 화기(火氣)로 쇠해진 대지에 서늘한 기운(金氣)을 보충해 결실의 가을을 준비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철학적 세시(歲時)’. 하지(夏至)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은 초복, 네 번째 경일은 중복, 그리고 입추를 지나 첫 경일이 말복이다. 복날엔 예로부터 개장국과 삼계탕을 즐겨 먹었는데 오행(五行)상 닭이 ‘금(金)’이고 개는 ‘토(土)’이지만 ‘금과 물 사이에 위치해 서늘한 기운을 상징’하는 데서 연유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땀을 많이 흘려 쇠약해진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백질을 보충해야하는데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원으로서 이만한 ‘육(肉)것’이 없다는 게 복날 개장국과 삼계탕을 먹게 된 ‘진실’일 듯싶다. 가뜩이나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얼큰한 국물을 한 그릇 들이켜고 난 뒤, 망태기에 담아 네댓 길 깊이의 우물에 담가 둔 참외라도 두어 쪽 베어 물어 보라지. 절로 힘 발이 불끈 솟아나고 말 테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더위란 놈을 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사가 어디 그런가. 아무리 시원하게 입고, 먹고, 마시고 해도 옴짝달싹 않고 물러가지 않는 찰짜가 이 놈이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저 물로 익사시키는 게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일러라! 요즘처럼 요란스런 바캉스란 게 없던 시절에도 무더위가 시작되면 술과 음식을 장만해 계곡 물가나 약수터 등을 찾아 청유(淸遊)하고는 했다. 특히 폭포 밑에서 물맞이를 할 때는 물에 들어서면서 바가지로 떨어지는 물을 한 모금 받아 마셔야 물의 영(靈)을 마시는 줄 알았고, 수신(水神)과 통해 물맞이 효력을 더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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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훈 칼럼니스트: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한국 중앙일보에서 경찰, 국방부 출입 등 사회부기자를 거쳐 문화재 및 인터뷰 전문기자를 지냈다. 향수를 자극하는 사투리나 아름다운 우리말 사용에 탁월하고 유려한 문장을 더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특산물 소개 등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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