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9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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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9월이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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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한여름의 열정을 속 깊이 안으로 삭이던 9월이 저물어간다. 이제 곧 농익은 가을이 붉디붉은 단풍과 함께 그 속살을 드러낼 것이다. “…9월이/ 지구의 북반구 위에서/ 서서히 물러가는 동안/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 너는/ 내 가슴 속을 떠나야 한다”(나태주 <9월이> 중) 


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너는 내 가슴 속에서 성숙한 열매로 익어가던 9월, 그 끝자락에 선 시인은 사과도 대추도, 아! 그리고 너마저도… 그렇게 모든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세월의 흐름을 아파한다. 땅을 갈고 씨 뿌리는 것은 봄의 일, 싹을 가꾸고 키우는 일은 여름의 몫이다. 결실의 가을을 앞두고 아직도 봄의 설렘이나 여름의 정열에 마냥 취해있다면, 그 인격은 정녕 초라할 것이다. 40에 불혹이요 50에 지천명이라, 개인이든 공동체든 장년의 원숙기에 이르면 분주했던 여름의 열기에서 벗어나 오롯이 성숙한 열매의 가을을 기다리기 마련이다. 


가을은 더 이상 명예와 성취를 향해 앞으로 달려가는 들뜬 계절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내고 내 삶 속에, 내가 속한 공동체 속에 지금 무슨 결실이 움트고 있는지 깊이 묵상하는 계절이다. 미움과 열등감의 한(恨), 오만과 자긍심의 굴레를 훌훌 벗어던지고 가을 열매처럼 싱그러운 인격을 맺어가는지, 아니면 쌓여가는 연륜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증오와 자만의 사슬에 질끈 동여매인 채 성숙을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치기(稚氣)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9월이 가면, 파릇한 봄의 아침과 시푸른 여름의 한낮을 뒤로하고 생명의 끝을 바라보는 가을 저녁에 이른다. 한 해 동안 걸어온 삶의 발걸음을 돌아보는 성찰의 계절이다. 그 성찰을 루쉰은 조화석습(朝花夕拾)이라는 글로 남겼다. 아침에 피었다가 떨어진 꽃잎을 곧바로 쓸어내지 않고 해가 진 뒤에 비로소 거둔다는 뜻이다. 낙엽을 쓸며 우리는 마음에 켜켜이 쌓인 애환의 찌꺼기를 함께 쓸어낸다. 그것은 하루의 삶 전체를 돌아본 뒤가 아니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하루의 진실은 아침이나 대낮이 아니라 하루 온종일을 살아내고 맞이하는 황혼녘에야 나타난다. 


‘진리는 전체다.’ 헤겔의 말이다. 진리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 안에 있다. 우리 삶의 진실도 그럴 것이다. 낙엽 쓸어내는 가을은 한 해의 삶을 두루 껴안아 관조하는 총체적 성찰의 시간이다. 가을 낙엽을 쓸며 우리는 그 진실에, 전체로서의 우리들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다. 9월이 가면 곧 낙엽이 질 것이다. 만물의 생명력이 시들어가는 9월의 끝은 그 황홀한 낙엽의 때, 진실을 잉태한 시간이다. 


유대력의 7월인 티슈리월은 우리의 9월과 10월 사이에 해당한다. 그 한가운데, 대속죄일인 욤 키푸르가 있다. 이날은 한 해 동안에 지은 죄와 허물을 뉘우치며 금식하는 날이다. 곡기를 끊는 것은 남에게 무언가 요구하며 떼를 쓰는 투쟁수단이 아니다. 목숨 걸고 제 삶의 길을 돌이키는 참회의 결단이다.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남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띠거나 얼굴에 보기 싫은 모습을 나타내지 말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위선자들을 경멸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9월의 끝, 속죄일의 금식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남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금식이다. 야릇한 시기에 거리나 광장에서 아리송한 단식의 침상을 펼쳐 드러눕곤 하는 정치인들이 속죄의 금식, 참회의 단식을 배우기 바란다. 


여름은 분주한 군중의 시절, 가을은 고요한 사색의 계절이다. 조화석습은 사물과 관찰 사이에, 대중의 감성과 고독한 이성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즉각적‧감성적이어서 맹신이나 혐오의 양극단으로 흐르기 일쑤다. 반대의 목소리에는 증오의 광기를 드러낸다. 


사과도 대추도 그리고 너마저도, 그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낸 뒤, 군중의 함성과 거리를 두고 허허로운 집단의식에서 한걸음 물러나 자신의 삶 전체를 관조하는 묵상의 계절… 9월이 가면, 가을도 깊어가고 그 묵상 또한 깊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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