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칼럼] 설봉산 시냇물이 흐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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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칼럼] 설봉산 시냇물이 흐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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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살아오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요?” 뜬금없는 내 질문에 “많지만…, 당신이랑 함께 사는 것” 요즘 청력이 부쩍 떨어진 남편이 ‘무엇이 행복하냐?’로 들었는지 그렇게 대답한다. 어찌됐든 나와 함께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남편 말에 기분이 좋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니 아들 귀한 집에 시집와 첫 아들 낳았을 때, 미술 좋아하는 작은 아들이 미국에 와서 미술을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했을 때, 이민 올 때 21세가 넘어 비자를 못 받았던 큰 아들이 한국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오게 되었을 때, 아들 결혼할 때, 할머니가 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은 순간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이렇게 행복한 순간들이 많은데 무엇이 최고의 순간일까 생각하며 남편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보니 결혼 전 남편과 연애할 때 찾았던 경기도 이천 설봉산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비탈에 선 나무의 나뭇잎 사이로 해님도 실눈으로 윙크하고 있다. 

   

친할머니, 스물일곱 살 엄마, 여덟 살 나, 두 살짜리 여동생, 이렇게 여자 넷만 남겨놓고 젊은 아빠는 사고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성년이 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성장하며 그리움은 더욱 커졌고, 항상 결손가정 아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나는 남자 없는 집 맏딸로 강해져야 했고, 센 척했지만, 이사 다닐 때마다 힘쓸 일, 전기를 다루는 일에 남자가 없음이 항상 아쉬웠다. 아빠 결핍으로 내 맘은 늘 허전했다. 

   

내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인천에 사는 친구가 오빠 친구들이랑 미팅을 하자고 했고, 그 자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따뜻하고 선한 이미지에 호감 가는 사람이었다. 남자 식구 없이 살아온 나는 그의 모든 일이 신기했다. 유머로 나를 웃게 하는 것이 신기했고, 코가 큰 것, 어깨가 넓은 것, 음식을 많이 먹는 것도 신기했다. 겨울날 자기 주머니에 내 손을 잡아 넣어 줄 때는 그 따스함이 내 온 몸과 마음을 전율케 했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가 이천 사회복지관에 취직을 했다. 소공동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나는 주말에 이천에 놀러 갔다. 그는 나를 설봉산으로 인도했다. 산 중턱 개울물가에서 우리는 땀을 식혔다. “여기 너~무 좋다, 내려가기 싫네!” 그이는 땀을 닦던 타월을 개울물에 있는 수면보다 조금 올라와 있는 바위에 턱 걸친다. “이 수건 마를 때까지 여기 있자” “뭐야, 빨리 가야돼! 버스 끊어질라” 웃으며 일어났다.    

   

올 10월이면 결혼 41년이다. 남편은 사람 좋아하는 인간중심의 사람이고, 나는 일 중심적이다. 남편은 아침형이고, 나는 야간형이다. 다른 것에 매혹되어 결혼했는데, 살아보니 서로 다른 것이 많이 힘들다. 그토록 사랑한다 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다투고 삐지고, 때론 도저히 못 살겠다는 생각에 극단적 상상도 해보곤 했다. 

   

그런데 내겐 아빠와 헤어짐의 상처가 잠재의식 속에 있다. 서로 의견이 안 맞아 마음 상해 등을 돌리고 자면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그의 체온이 그립다. 그래서 자존심 상하지만 항상 내가 먼저 그의 품을 파고든다. 기다렸다는 듯이 슬그머니 받아주는 그이가 얄밉지만 고맙다. 아빠 결핍이 남편의 소중함을 몸이 더 잘 아는 것이다.

   

이천 설봉산 개울물 소리가 내 귀에 들리고, 설봉산 바위에 올려놓은 수건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행복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설봉산 개울물이 쉬지 않고 흐르듯. 나의 삶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찰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누릴 수 있는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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