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행복칼럼] 피고석의 하나님과 보좌의 하나님


홈 > 로컬뉴스 > 로컬뉴스 > 종교
로컬뉴스

[강태광의 행복칼럼] 피고석의 하나님과 보좌의 하나님

웹마스터

c1e7eb485ed255bdc11a8fd3d4a1d8fb_1694794350_9555.jpg
 


지난주에 '다민족 지도자 초청 조찬기도회'를 했다. 타 민족 기도사역자들을 아침에 초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준비도 진행도 어려웠지만 잘 마쳤다. 뒷정리를 하는데 차 한 잔을 청했다. 하원의원 후보 그리고 잘 아는 분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앉자마자 어느 분이 “이런 후보를 당선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라고 했다. 그것도 몇 차례 반복해서. 

   

황당했다. 어렵게 기도회를 준비했고, 비지땀 흘리며 기도회를 인도한 목사 앞에서?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곧 그분 맘이 이해되었다. 특별한 악의 없이 툭 뱉은 말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원성도 있었고 곧 사과 메시지도 왔다. 개인감정이나 불편함은 없다. 그러나 온종일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도하며 느끼는 무력감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절망감을 공감한다. 답답한 현실이다. 그를 비난할 맘이 없다. 그러나 그의 말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성도는 그래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행동이 필요하다고 해도 기도하며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그런데 ‘성도는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는 이 단순한 일이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피고석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고대인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가듯이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현대인은 재판장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힌다"라고 말하며 현대인의 비뚤어진 신앙을 일갈한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놓았다’라고 갈파한 것이다. 

   

C. S. 루이스는 같은 책에서 기독교가 세상 문제에 일일이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는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지만 요리 교습을 하지 않는다. 요리는 요리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루이스의 논점(論點)은 기독교인이 세상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 강변에서 울면서 기도했다(시137:1). 아무리 기도해도 변화가 없는 절망의 70년을 보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몇몇은 불평하고 더러는 절망했을 것이다. 그래도 기도하는 사람들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들이 에스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다. 그들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들 손에 하나님 백성이 고통당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 따지듯 물었다. 어느 때까지(합1:1) 이래야 합니까? 어찌하여(1:3, 1:13, 1:14) 이런 일이 있습니까?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따지듯 묻는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2:3)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라고 응답하신다.

   

하박국의 부르짖음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는 ‘인내하며 믿음으로 반응하라!’라고 답하셨다. 신약은 이 말씀(롬1:17, 갈311, 히10:38)으로 복음을 정리했고, 종교개혁자들은 이 말씀으로 종교개혁을 했다. 하박국은 절망 위에 절망이 쌓이는 상황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을 보좌에 모시고 기도하는 자들이 응답받는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피고석 있는가? 아니면 보좌에 계신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c1e7eb485ed255bdc11a8fd3d4a1d8fb_1694794394_5879.jpg
 

0 Comments